우리가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믿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회개에 이르게 되는것도 아닙니다. 이런것은 두번째 단계인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설명할때 우리는 낳음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낳음을 입은 자들입니다. 어떻게 낳았냐면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구원에대해서 자랑할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구원에 대해서 자랑할것이 없을까요? 그것은 구원이 내가 얻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 선물을 받은것에 대해서 우리는 자랑할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의와 노력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것이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제가 회개가 우선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로 회개가 우리의 구원의 공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했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라는 논증이 되어버리면 나에게 구원을 받을수 있는 공로가 생긴것입니다. 회개했다는 공로말입니다. 곧 이건 내가 구원받는데 일종의 신인협력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나에게 자랑할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했다라고 말할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회개라는것은 그런것이 아닙니다. 내가 회개를 할때 어떤것을 회개해야 합니까? 어릴적에 지은 죄부터 몽땅다 회개해야합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죄까지 회개해야합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할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수 없다.라는 논거도 분명 이런 논거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것은 회개할것이 없다는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죄가 없다는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다 죄인이라고 말하지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분들은 본적이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보시면 두 죄인이 한쪽죄인은 회개했고 한쪽 죄인은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두 강도가 첨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것입니다.(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달은 한 강도는 죄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고 우리는 죄인이라서 당연히 십자가에 달려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다. 라고 말하며 낙원에 갈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강도는 자기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맨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정말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는게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도 믿어야하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해야하고 세상으로부터는 욕을 먹어서는 안되고 욕을 먹는건 내가 잘못해서 욕먹는거라고 오해를 사야하고 또 교회열심히 다니면 정신병자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게 우리들입니다. 군대에서나 사회에서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환자라고 부르죠. 교회다니는 환자 병자라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라는 말입니다.
정말 피곤한게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또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까지 강요를 당합니다. 저는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강요하는것이 싫습니다. 그냥 사십시요. 죄짓지말고 욕먹지 말고 착하다는 소리 들을정도로 만족하고 사는것은 어떨런지요? 교회다닌다고 티내는것도 싫습니다. 전 전도도 안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교회다닌다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착하게 살면 가증스럽다고 하고 욕하면 기독교인이 입이 더럽다고 말합니다. 선행을 해도 욕먹고 싸움을 해도 욕먹습니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고.....여러분도 그런 말 들어본적 없습니까? 그런 상황에 처해본적이 없습니까?
가뜩이나 인생피곤한데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고 나서 우리의 삶은 행복해진것이 아니라 더 피곤해졌고 더 행동에 규약이 오고 뭔가 억매여서 사는 것같고 착하게 살자니 내성격 아닌것같고 좀 강하게 살자니 그냥 마음에 꺼리낌이 생기고....전 이글을 쓰면서 한숨이 나옵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을 할때 그 말은 누구를 향해서 하는 말입니까? 나에게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까? 다들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증스러워서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을것입니다. 특히 홍대새교회 전목사같은 여의도의 커다란교회의 다윗이라고 칭하는 거시기에게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준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경향교회 석뭐시기 목사 바람피웠다가 떨어저죽은 목사에게.....주변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겠지요. 이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그 말을 매일 반복해서 해보십시요. 넌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니? 라고 묻는다면......교회를 나갈수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매정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이 불렀다는 것입니다. 자랑할것이 하나도 없고 내세울것이 하나도 없고 정말 인생 밑바닥의 최저점에서 박박기고 있는 나를 하나님이 불러서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피곤한 삶을 살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왜 이짐은 행복한 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짐이고 소망의 짐이며 믿음의 짐입니다. 이 짐은 많이 짊어질수록 행복해지는 짊입니다. 이 행복한 짐이 우리에게 있는데....왜 자꾸 회개의 짐을 지라고 하는지? 그렇게 우리가 많은 죄를 짓고 살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죄를 좋아하지도 않고 죄를 기뻐하지도 않고 죄를 짓는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은 별로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죄는 무거우며 짊이고 지기 싫은 짐이고 져서는 안되는 짊이기 때문에 이 죄의 짊은 되도록이면 짊지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고 있는게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홍대새교회 전목사를 탓하기 이전에 나는 이런 짊을 지고 있지 않은지? ....전목사...저는 솔직히 그분이 불쌍합니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그 무거운 짊 언젠가는 하나님이 걷어주실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야하고요 그가 회개할날이 올겁니다. 아마 지금쯤은 회개했을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그에 대해서 전부 다 아는것은 아니니까요.
뭘 말하려고 했는지 헷갈려 버렸네요.
제 성경신학에서는 이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말씀한 이 부분이 우리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한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할례받은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에게 없는 제사를 통한 죄사함을 받는 축복을 받은 자들인것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그들은 죄에대해서 용서를 받을수 있는 축복과 또 그들에게는 메시아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을수 있는 축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언약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맛본 자들입니다. 할례자들로서 그들은 죄와 상관없이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택함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을 쫓아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쫓아가는 행태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보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이방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언약밖의 사람들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입니다. 이 불쌍한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해서 그들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이 열매가 바로 이방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언약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길때 그들은 복을 받아 부유함을 누렸습니다. 이 복을 누리는 모습을 이방인들에게 보임으로 이방인들이 바알을 숭배하고 아세라를 숭배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그들이 받을 복을 이방인들도 함께 받게 하기 위한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인데....이스라엘이 이런 일을 안하고 오히려 그들이 이방인을 쫓아서 우상을 숭배하고 바알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받고 벌받아서 나라를 잃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는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스라엘이 행하지 못하니 얼마나 하나님의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겠습니까! 자기들은 축복받은 민족이고 이방인들은 짐승취급을 했으니....사마리아여인이 자기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에 비유했으니 말입니다.
성경에서 회개해라! 돌아오라! 이런 말씀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백성들에게 한것입니다. 왜? 그들은 할례를 받은 언약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구별되었다는것이고 언약을 받은자로 가나안땅을 약속으로 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할례는 죄를 사함받은것이고 영원한나라의 백성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약속을 믿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것처럼 그 후손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야지만 언약에서 쫓겨나지 않고 언약을 상속받을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할례로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무할례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할례자들이 된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곧 천국백성의 위치에서 쫓겨나게 된것입니다. 이 언약을 회복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라고 선포한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한 선포입니다. 할례를 받았지만 죄를 범하여 무할례자들이 된 자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선포한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이 세례가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지만 죄를 지어 무할례자들이 된 자들에게 세례를 통해서 언약의 백성의 위치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세례를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할례도 세례도 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도 이 축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고넬료를 통해서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것을 보고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복을 이방인에게도 주었다는것을 그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이 부름받은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복을 받고 그 복을 온땅에 전하여 온 이방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겨 이스라엘과 함께 복을 누리게 하고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것을 감당하지 않으니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 심판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을 직접 주시게 된것입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렸는데...만약 이스라엘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이방인들은 얼마나 큰 복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많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방인에게도 저주가 되었습니다. 이 이방인에게 저주가 된 이스라엘의 그 악한 행실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서 이방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없이 2천년을 떠돌면서 이방인에게 구박과 학대를 받게한 하나님의 역사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성경을 볼때 어떤 신학사조에 의해서 성경을 보게되면 성경을 통전적으로 볼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하게되고 이는 참으로 우리에게 불행한 일인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해석하면 알미니안주의식의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칼빈주의식 해석은 성경에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해석하면 칼빈주의적 해석이 나옵니다. 제가 볼때 그렇습니다.
알미니안식의 해석은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가 아니라 신인 합력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들을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식 해석은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가 나타나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게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못하여 이방인에게 복을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직접 이방인을 구원하러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강권적으로 역사하기때문에 벌어지는 일들로서 칼빈주의적 해석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해석하면 이런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깨달은것들인데....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제가 깨달은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런글을 쓴것이니 제가 제 지식을 자랑한다거나 강요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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