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코스 문제에 대하여 대단한 열의를 가지시고 수고하십니다. 알파코스에 대한 것은 성경으로 판단하여 할 것이니 성경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창조와 섭리로나누어지며 창조는 과학적인 문제이니 과학적인 분야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도 완벽한 단계가 아니니 이해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섭리입니다. 이 섭리는 역사적인 문제이며 에덴의 섭리와 가나안의 섭리로 나누어집니다. 이 중에서 에덴의 섭리가 기본이며 가나안의 섭리는 에덴의 섭리를 위한 제 2의 섭리가 됩니다.
에덴의 섭리에는 생명과와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죽지 아니하고 영생하나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뱀의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여자와 뱀은 원수가되고 이들의 후손도 그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로 이하여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곧 자연 환경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어 생명과를 먹을 수없게 된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지못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죽음은 죄의 값입니다. 죄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법을 번한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보다 뱀을 더 믿은 죄입니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에덴에서 생명과를 없애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때 에덴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의 후손의 정체를 알게하는 것이 가나안의 섭리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계시록 12장에서 등장합니다. 곧 여자와 뱀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입니다. 곧 가나안의 섭리는 그리스도와 과련된 섭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섭리는 새 언약과 첫 언약과 영원한 기업의 약속의 섭리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새언약은 복음이요 첫 언약은 율법이며 영원한 기업의 약속은 열조의 언약입니다.
열조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후손에게 가나안 일경을 영원한 기업으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언약은 율법을 지켜야 열조의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 살게 되나 범하면 저주를 받아 열국에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의 저주가 열조의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니 율법의 저주에서의 구원은 열조의 언약으로의 회복입니다.
율법에는 두 가지의 법이 있습니다. 곧 지키면 복이요 범하면 저주인 상벌의 율법과 상벌의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속죄의 율법입니다. 이 속죄의 율법은 레위의 언약에 속하는 것으로 제사입니다. 곧 상벌의 율법을 범하면 제사를 드림으로 속죄됩니다.
이 속제의 제사를 대신한 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린 것으로 이를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레위의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복음이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이지 상벌의 율법의 새 언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복음은 상벌의 율법을 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상벌의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할 뿐입니다. 속죄의 율법에 첫 언약과 새 언약이 있듯이 상벌의 율법에도 첫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상벌의 율법의 첫 언약에는 이를 범하면 열국에 흩어지는 저주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조의 언약은 영원하고 율법의 저주는 끝이 있어 이 저주가 끝날 때 열조의 언약에 의하여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면 새 언약이 세워지며 이 새 언약에서는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정죄하지 아니하고 죄를 도말하시어 용서하시게 됩니다. 곧 저주가 없어 다시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하여 그 나라가 영원합니다.
이 새언약 시대에 다윗의 보좌가 회복됩니다.
다윗은 왕으로 정치적인 인물입니다. 이는 속죄의 율법이 레위와 관련된 것이듯이 상벌의 율법은 정치적인 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다윗의 뿌리요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용 곧 뱀의 권세를 멸하여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을 중건하시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은 첫 예루살렘이 있던 곳에 중건되는 것으로 가나안의 회복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강과 생명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에덴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에덴을 회복할 자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상에서 열조의 언약은 에덴으로의 회복에 대한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열조의 언약을 결코 변치않는다고 맹세로 보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알파코스의 교리가 이와 일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알파코스에 역사한다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같이 열조의 언약을 얻게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파코스가 가톨릭과 손을 잡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톨릭은 로마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열조의 언약을 얻게하는 종교이나 로마교는 열조의 언약을 철저하게 폐하는 종교입니다. 이 로마교는 열조의 언약을 폐하는데 복음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교의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정 반대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택함과 다름니다. 복음과 택함의 차이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복음으로하면 이방인을 인하여 원수된 자이나 택함으로는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을 인한 택함이라면 잉태전 또는 출생전에 택함을 입게 됩니다. 곧 율법을 적으로는 율법을 범하기 전이니 죄가 없을 때 택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택함은 죄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복입니다. 복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 받는 것입니다. 이는 죄가 있으면 저주 아래 있다는 것과 다릅니다.
그러나 이 택한 자도 죄를 범하면 복음에 의하여 구원되는 것이 율법의 저주에서의 구원입니다. 율법의 저주란 열조의 언약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열조의 언약이 없는 이방인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구원도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유대인과 같은 방법으로 구원됩니다. 곧 복음에 의한 구원으로 믿음에 의한 구원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죄인에게 주는 것이요 택함은 죄없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곧 복음을 믿어 의인이 되면 택한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곧 구원은 믿음에 의하고 축복은 택함에 의합니다.
그러나 이 택함과 복음이 구별되지 못하고 칼빈 주의는 택함에 알미니안주의는 복음에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열조의 언약과 율법과 복음이 정의 와 관계가 알파코스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뎃글 펌...
알파코스 문제는 먼저 그리스도교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는 종교입니다. 여기서 새 언약은 복음이요 첫 언약은 율법이며 영원한 기업의 약속은 열조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열조의 언약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바뀌어 로마교가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열조의 언약을 얻는 복음이 열조의 언약을 폐하는 복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곧 현재의 그리스도교란 사실상 이 로마교의 열조의 언약을 폐하는 복음을 믿는 종교로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를 열조의 언약을 폐한 로마교와 차별화를 없애는 것이 알파코스가 아닌가 합니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은 이러한 로마교는 열조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교와 차별화를 없애는 알파코스는 한국 교회를 유럽 교회와 같이 몰락하게 할 것입니다. 물론 현재는 좋은 것 같으나 결국에는 열조의 언약이 이루어질 때 멸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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