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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개혁해야할신앙

소통하는 교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소통......

 

작은 거래라는 말일까?  아니면 작은 통로라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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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하는 것. (2) 뜻이 서로 통해서 오해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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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한자어가  소통의 의미를 잘 전하는 것이라고 본다.
"뜻이 통하여  오해가 없다"라는  이 단어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요즘 난 이 소통의 문제에 매우 몰입하는 것같다.  뭔가 막혀 있으면 참 답답함을 느낀다.
막혀있다....이는 답답함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래  소통하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고 함께 생활했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때는 아무런 염려도 근심도 없었을것이다.
필요한것은 이미 다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소통하지 못하게 된것이  선악과를 따먹은후 죄를 범했을때
인간은 하나님과의 소통하던 공간에서 내쫓기게 되었다.
 
죄라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소통을  단절시키게 되었고  소통이 단절된 인간은
더더욱 범죄에 빠지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단지 선악과만 먹었을 뿐이지만  그 아들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범하기
까지 했다.  그리고 그 후손은  더더욱 손에 피를 묻히기를 자랑스러워 까지도 했으니....
 
인간이 소통하지 않으면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소통한다는것은 서로 막힌것을 풀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서  막힌것을 풀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셨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를 할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신과 소통하게 된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소통을 하게 된 인간은 소통을 통해서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된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악을 발견하게 된것이 문제가 되었다.
 
하나님을 알게되고 예수님을 믿게되면 제일먼저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죄성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그들이 발견한건 벗고있는 몸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은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은 소통하게 되면서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것이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몸을숨긴 아담과 같이 된것이다.
 
그런 아담을 향해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이는 아담을 징벌하기 위해 부른것이 아니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네가 벗고 있는걸 누가 가르쳐 준것이냐....이는
죄를 깨닫게 함인것이다. 
 
죄를 발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깨달은 인간을 향해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하나님께서 죄를 책망한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죽임으로서 그 생명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는 행위를 하신것이다. 
 
이 용서의 증표는  예수님이  단번에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첫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죄가들어온것이  둘째 아담을 통해서 모든 죄가 사해질수 있음을
인간에게 가르치는  엄청난 사건이 된것이다.
 
죄를 깨달은 인간은 양을 잡아 그 죄를 임시적으로 용서를 받을수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과 소통할수 있었지만  인간은 죄악에서 벗어날수 없다.
 
그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한것이 바로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고 그분은 하나님과 막힌 통로를
여셨고  단 한번의 제사로 예수님만 믿으면  무조건 죄사함을 얻게되는 영광과 기쁨을 허락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죄의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 예수님을 사용하신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과 하나님과 가려진 모든 담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죄는 그를
의지하면  다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기쁨과 구원의 찬송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막힌것이 사라짐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수 있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이 소통함을  신부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식으로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폄훼시키고 있으니
천주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나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고 볼수 없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때 이렇게 기도한다.
 
하늘에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지만 이 소통의 통로를  늘 막고자 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내 자신이다.  하나님은 이미 소통의
길을 열어 놓으셨고 우리가 부르면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이 길을 막고 하나님이 오시는걸  금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죄악의 본성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다.
 
자기가 죄를 짓고 싶고 어둠속에 있고 싶지만  하나님은 그 길을 인간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인간에게 요구하는 길은 바로  빛의 길이고  선한길이며 사랑하는 길이다.
 
사랑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건 서로 짐을 지고 예수님의 짐을 지는 길이다.  예수님의 짐은 가볍고  행복한 짐이다.
 
우리에게 매여있는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짐을 진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쁨을 맛볼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