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깊은 교회를 꿈꾼다.
- 복음적 영성 -
머리말
한국교회가 부패의 질곡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으려면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복음적 영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민주적 정관의 확립과 그를 바탕으로 한 교회재정의 투명하고 균형 잡힌 운영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필수적 요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적 영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제도개혁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 다시 왜곡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사실 오늘 한국교회부패현상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 보면 복음적 영성의 상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세속화되고 왜곡된 영성이 암세포가 되어 교회전체를 죽음의 자리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이 부패하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진실하고 실천적인 사랑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종교적인 형식 즉 빈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겉으로 볼 때 기도 열심히 하고 예배를 열정적으로 드리고 성경묵상에 많은 시간을 드리면 내면의 진정성이나 그 밖의 다른 삶의 모습은 어떻든 간에 영성이 있는 사람으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자기뿐 아니라 교회공동체 전체를 속게 만들어 전혀 경각심을 갖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중세교회가 썩기 시작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습니다. 종교개혁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중세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영성을 청산하고 복음에 기반을 둔 영성을 회복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복음적 영성은 몸과 물질적인 것은 악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보며 영과 영적인 것은 선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원론적 영성은 세상에서의 일상적 삶에 무관심하고 좁은 의미의 종교생활에만 몰두합니다.
반면 복음적 영성은 바울서신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게 된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합니다. 믿음과 세상에서의
일상생활이 온전하게 결합되는 총체적인 삶 자체를 의미합니다. 복음적 영성은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삶이요 둘째는 이웃을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살고 땅에서도 삽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복음적 영성을 잘 요약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1.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삶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을 진정으로 믿게 된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절정이 바울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빌 1:20-23)
지금 바울은 감옥에 잡혀 있습니다. 복음전파에 있어서 그와 경쟁의식을 가졌던 사람들은 때는 이때다 라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마음을 괴롭힐 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의 영성이 얼마나 순수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바울은 어떤 동기로 그리스도가 전해지든지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남아 그리스도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지금 죽어 주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진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썩어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러한 순수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영성의 순수성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은 소위 기복 신앙적 요소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용하다(use/uti)”는 말과 “향유하다(enjoy/frui)”는 말을 구분하였습니다. 무엇을 즐긴다는 것은 그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무엇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용해서 좀더 중요하고 정당한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기복신앙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저서 「신의 도성」에서 자주 이용의 대상인 세상의 재화를 향유하고 향유의 대상인 하나님은 이용하려는 위험성을 경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향유하고자 원하면서 하나님을 단지 이용하려는 것은 오용(perversion)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돈을 쓰지 않고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 한다”1) 이것이 기복신앙의 핵심입니다. 즉 하나님께 다양한 축복을 구하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축복추구가 표면적인 고백과는 상관없이 실제적으로는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데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질적 목표를 하나님 열심히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겠다는 데 두는 개인주의적 기복신앙이 오늘날 영성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나아가 교회를 부패의 늪으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목사는 복 빌어주는 일종의 샤먼으로 전락되고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거래가 형성됩니다. 목사는 성도가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그 과정이 과연 정의로웠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묻지 않습니다. 성공한 성도가 거액의 헌금을 하면 그 출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을 잘 믿어 축복 받은 사람으로 추켜 세워줍니다.2) 성도들은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을 잘 따르고 떠 받혀줍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장로로 임직하기 위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헌금을 드리는 관행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결국 교회 안에 진리와 정의는 설자리가 없어지고 맘몬이 실권을 휘두르게 됨으로써 교회는 썩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기복신앙을 노골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복신앙이 한국교회 안에서 어떻게 교묘하게 가르쳐 지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PDF판을 보면 고후 8:9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가난과 성도의 부유함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 부유함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신 것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 부요를 누리며 살아야 하며, 받은바 축복을 나누어주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길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누는 삶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를 위해서 우선 부자가 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진리를 비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는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고후 8:9의 맥락은 정 반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독려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진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은혜에 동참하자는 뜻으로 말씀한 것입니다(고후 8:1-9).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동을 받고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구제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우선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어야한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마게도냐 성도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성을 지닌 사람은 물질적 풍요를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않을 뿐 아니라 이론적으론 부차적인 수단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거기에 얽매여 사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삶에 진력할 뿐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부의 창출에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것 외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부를 멸시하는 금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마저 충족시키지 못한 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의한 현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압니다(빌 4:12).
이 점에서 요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위 신청부론(新淸富論)도 조심스럽게 살펴봐야 합니다.3) 신청부론은 물질적 성공을 축복으로보다는 일종의 은사로 봅니다. 또한 아무렇게나 성공해서는 안되고 정직하게 살아야 됩니다. 또한 성공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몫과 이웃의 몫을 확실히 떼어나야 합니다. 부자와 힘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돌보는 흐름이 있을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남는 부는 자유롭게 즐겨도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깨끗한 부자로서 모든 신앙인이 그런 사람이 되도록 힘쓸 것을 권유합니다.4)
신 청부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기존의 기복신앙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질적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강력히 주장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이나 결론을 보면 그 차이가 무색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도 되고 권력자도 될 것이다.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부자와 권력자가 될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 이런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전심으로 바란다.5)
기존의 기복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아무리 부자가 되었더라도 자기만을 위해 쓰는 사람을 축복 받은 사람이라곤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적어도 이론적으론 종종 돈을 버는 과정이 윤리적이어야 하고 돈을 번 다음에는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구체적인 삶과 교회현장에서 철저하게 그러한 원칙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속기 매우 쉬운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고세훈 교수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의 서평에서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깨끗하고 떳떳한 내 몫의 “부(富)”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행보는 이미 “넓은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버지의 집에서 장사하는 자의 집으로 바뀐 것에 대해 대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의 이익과 물질적 번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핵심적인 문제임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기복신앙을 극복하려면 구약의 축복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을 약속하십니다(신 28:1-4). 그러나 그 축복도 자세히 드려다 보면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주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이 축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입니다(신 15:1-18; 행 4:31-37).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진행되었던 구약시대에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축복의 약속은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개인주의적 번영을 도모하는 기복신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물질적 번영마저 구속역사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한 것도 결국 아브라함의 신앙적 영향력과 교육의 결과로 그 후손들이 공평과 정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창 18:18-19). 구약에서도 결코 성공과 번영이 믿음의 최종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순수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욥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련을 허락하셨습니까? 사단에게 욥의 믿음이 기복신앙이나 번영신앙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임을 입증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욥 1:6-12).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이나 번영과는 관련이 전혀 없는 순결한 믿음이었습니다(단 3:1-30). 이렇게 구약에서조차도 개인의 이기적인 축복추구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무속적인 전통과 군부독재시절의 경제성장제일주의가 기독교 믿음 안으로 스며들어와 오염시킨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과 번영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교회가 대체로 쉽게 양적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충돌 없이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즐거운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복음에는 진정한 십자가, 좁은 문 그리고 좁은 길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교회내의 생활에 대한 충실성이 이를 대신 할 뿐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본회퍼는 ‘값싼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상실한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기복신앙을 회개하고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는 별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경고한 것처럼 하나님을 필적할 만큼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적은 바로 바로 맘몬(재물)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마 6:24). 경제학자 허경회는 ‘신은 죽었다. 그러나 돈의 신, 맘몬은 예외이다. 우리들 현대인에게 그는 유일하게 현재(顯在)하는 신이다. 우리들은.... 맘몬의 영광을 이 땅에 재현하는 거룩한 맘몬의 성도(聖徒)들이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6) 비록 경제학자의 글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맘몬의 위험성을 가슴깊이 새겨 기복신앙을 회개하고 이런 믿음이 교회강단과 성도들의 삶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 개혁의 첫 걸음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바울의 메시지가 힘차게 외쳐져야 합니다(행 14:22). 마틴 루터의 그 유명한 95개 조항으로 된 반박문의 마지막 조항은 486년이 지난 지금에도 너무나도 실감나게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따라서 거짓된 평화의 보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하십시오”.
2. 이웃을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삶
복음적 영성의 두 번째 측면은 이웃을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웃사랑의 실천이 온데간데 없어진 영성은 반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이웃사랑을 실천한다고 해도 사회참여를 생략한다면 이 역시 반쪽일 뿐입니다. 그런데 반쪽 영성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최선의 가장 무서운 적은 최악이 아니라 차선이듯이 진리의 가장 무서운 적은 적나라한 거짓이 아니라 그럴듯한 반쪽 진리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테니슨도 「할머니」라는 시에서 반쪽 진실의 위험성을 간결하게 읊었습니다: “진실을 반쯤 섞은 거짓말이 가장 시커먼 거짓말/ 온통 새빨간 거짓말은 즉각적으로 대항하여 싸우기가 쉬운 법/ 그러나 일부분만 진실인 거짓말은 훨씬 싸우기가 어렵다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개혁되려면 반쪽 영성을 회개하고 이웃사랑의 실천과 사회참여를 회복함으로써 온전한 영성을 확립해나가야 합니다.
1) 이웃사랑의 실천
영성의 온전성을 회복하려면 우선 진정한 믿음은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우리에게 실천적 삶을 요구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실 때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8:20). 복음을 듣고 믿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복음은 듣고 실천적 삶으로 체화되어야 믿음은 그 온전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온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만큼(신 6:4-5)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레 19:18).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두 가지로 간결하게 요약하신 것입니다(마 22: 37-40). 또한 산상수훈에서는 이웃사랑이 구약전체를 반영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마 7:12).
믿음과 실천 사이에 자리매김을 구태여 한다면 그것은 분석적인 이해의 문제이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그렇게 강조한 바울도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고 천명함으로 믿음과 사랑의 삶이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웃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분명히 함으로서 윤리의 본질적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롬 13:10). 놀라운 것은 이신칭의의 진리를 새롭게 회복해서 믿음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했던 루터도 그의 95개 조항 반박문중 43조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궁핍한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더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더구나 45조항에서는 심지어 “이웃의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는 본체만체 하면서도 면죄부를 사기 위해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라고 까지 말하면서 사랑이 담긴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는 순간 그 진실성을 아십니다. 우리의 실천을 증거로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한 우리의 의로워짐 즉 구원은 궁극적으로 믿음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7) 그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하고자하는 행함입니다(약 2:14-26). 칼빈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행함은 의로움을 전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8) 즉 행함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가면과 같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스스로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주제였던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표현에서 ‘오직’이라는 단어도 믿음을 인간의 공로로서의 행위와 강하게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결코 믿음의 당연한 열매로서의 행위를 배제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9)
더 나아가 행위가 믿음의 자연스러운 열매라고 할 때 믿기만 하면 윤리적 삶이 자동적으로 따라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점은 바울이 구원의 교리를 밝힌 다음에는 반드시 동일한 열정으로 실천적인 삶에 대해 자세히 권면한 것에서 입증이 됩니다. 믿고 의로워진 성도들이라고 해도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고 인격적이며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윤리적인 실천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 이신칭의라는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실천이 결여된 믿음을 너무나 쉽게 용인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기만 하면 삶을 강조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처럼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천이 결여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왔고 그런 사람들이 별 부담 없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자연히 도덕성을 상실하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위상이 추락된 교회는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 것은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이들 중에는 이와 정반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2002년 6월 17일에 곽선희 목사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주최하는 전국목회자 수련회에서 ‘목회자 영성의 위기와 그 대안’이라는 제목으로 주제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는 강의를 통해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목회자가 탈진하기 시작한 것은 복음과 은혜대신 윤리 즉 인권, 가난, 사회, 정치, 생태계 등의 이야기를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즉 빈민 속에 들어가는 삶, 병자를 일생 돌보는 것, 인권을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유일한 그리스도(The Christ)를 전하는 대신에 마치 “한 그리스도(a Chirst)를 본받아 내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려는 것‘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까지 복음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여야하느냐를 강조하는 것, 즉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은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윤리를 이야기하면 율법주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곽선희 목사는 그러한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윤리 자체를 폄하하고 복음과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믿음에 기반을 둔 실천적 삶을 회복하는데 사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앞으로 더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반쪽 믿음에 도취되어 진리를 왜곡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적 열정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들을 도와주지 않으심으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삼상 4:1-11). 그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사 1:10-17; 미 6:6-8).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삶이 없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못 박아 말해주고 있습니다(렘 22:16).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7:3).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님을 못 알아 본 사람이고 결국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마 25:31-46). 복음이 요구하는 실천적인 삶을 실현함으로서 믿음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2) 사회참여
영성의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좀더 나아가 믿음이 요구하는 사회참여의 사명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는 실천적 삶을 좀더 심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실 때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마 28:20). 사회참여의 당위성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수할 때 우리의 취향이나 형편에 따라 취사선택하면 안 되고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함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셨다는 점입니다. 온전한 복음이란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든 것을 포함한 복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은 복음전도와 사회봉사 뿐 아니라 이웃사랑의 실천을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구조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회참여를 모두 요구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진보주의와 복음주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믿음에 대한 이해가 이원화되는 현상이 있어왔습니다. 진보진영에서는 해방신학과 민중 신학의 흐름을 받아드려 개인적인 중생과 회심을 강조하는 복음전도를 소홀히 하면서 사회적 책임과 민중해방의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주의 진영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속의 진리를 강조하는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던 반면에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의 전반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을 복음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은 구제나 봉사활동으로 미미하게 표현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이러한 이분법적인 이해는 반쪽 진리임을 곧 알 수 있게 됩니다.
최근 들어서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조금씩 해소되고 있는 듯한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와 성도들의 사회참여는 소수에 국한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는 정치인은 많아도 기독교적 이념과 가치를 정치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나갈 수 있을 만한 정치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사회구조의 다양한 모순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을 배울 수도 없으려니와 어떤 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사회문제들을 외면한 채 개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기껏해야 기존체제에 잘 적응하는 성실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한국교회는 사회참여의 당위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이 요구합니다. 경제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교회를 잘못 오도하는 관점은 교회는 정치문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정(政)․교(敎) 분리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교회가 정치․경제구조에 대하여 무관심해 온 것을 정당화해온 셈입니다. 물론 화란개혁신학의 영역주권이론에서 잘 밝혀진 것처럼 정치․경제와 종교를 혼돈하여서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경제는 인간의 물질적․사회적 삶의 차원을 다루고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개인적 삶의 차원을 다룬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비기독교적 발상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기본적인 틀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이야기입니다.10) 창조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만드셨고 그 가운데는 인간에게 부여된 소위 문화사명이라는 것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은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더 나아가 인류의 정치․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여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사명이 있습니다(창 1:26-28). 타락이야기는 이 질서와 사명이 여전히 타락한 인간에게도 유효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노아에게 문화 창조의 명령이 다시 한번 주어지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다만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 간 문화와 바벨탑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이 타락한 인간은 문화 창조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구하기보다는 자기만족과 영광을 구하기를 원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타락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구조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의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구속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인간을 문화 창조의 영역에서 해방시켜서 물질세계와는 무관한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제사장적 기도에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 한 가운데 있으면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셨습니다(요 17:15).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8). 이는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부른데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마 5:13-16). 그리스도인에게는 타락한 세상의 한 복판으로 보내서 비뚤어진 방향을 바로잡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A. 카이퍼(Kuyper)가 주장한 것처럼 기독교세계관은 인간의 전(全) 실존(實存)이 신(神) 의식(意識)에 젖을 것을 요구합니다.11) 즉 인간의 모든 삶의 분야에 믿음이 스며들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정치경제구조는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정치경제구조의 문제도 기독인의 깊은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쉐이퍼가 잘 지적한 것처럼 정․교 분리의 원칙은 결코 교회를 정치․경제문제와 관련시켜서 침묵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12) 교회의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의 사상이 아니라 믿음의 사사화(privatization)를 주장하는 소위 근대자유주의의 영향입니다.
둘째, 개혁신학이 주요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그 기초가 잡힌 개혁신학의 중심에는 만인 제사장론과 소명사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명상하고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에서 사제 역할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거룩한 제사장이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을 통해 세상에서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한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통해 이웃의 구체적 필요를 채워주는 소명을 받은 자라는 것이 신학적으로 분명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부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기독교 강요에서 놀랍게도 공직(civil authority)은 ‘인간의 생애를 통틀어서 모든 소명 중에서 가장 성스럽고 명예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13) 죄악된 세상에서 문화명령(창 1:26-28)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꺼이 손에 떼를 묻히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14) 먼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면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의롭게 하시는(justifying) 하나님은 곧 정의(justice혹은 righteousness)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 통치의 핵심도 정의입니다(사 11:1-5).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구원받고 회복된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게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공동체 구성원간의 정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관계의 핵심적 내용은 가난한자의 권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15)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시혜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정치․경제 구조적 차원에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자들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법을 제정하심으로 분명히 하셨습니다(신 24:10-22). 이러한 사상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딤후 3:16).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로워진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 자신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목숨을 걸만큼 매우 중요한 사명으로 인식했으며(갈 2:10; 행 20: 22-24; 21: 13; 24: 17; 롬 15: 26)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dikaiosyne, 고후 9:9)임을 밝혔습니다. 다만 바울이 좀더 적극적으로 정치적 행위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원리적 차원에서보다는 그 당시의 교회의 입지와 정치적 형편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좀더 깊이 해야 합니다. 눅 4: 18, 19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애 취임사를 누가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의 사역이 가난한 자들과 억압당하는 자들을 돌보고 세상의 억압구조에서 해방시키는 정치․경제적인 일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도전함으로서 백성을 탈취하는 이스라엘 사회의 억압과 탈취 구조의 핵심을 지적하셨습니다(마 21: 13). 더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dikaiosyne)를 추구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보내십니다(마 5: 13-16; 6: 33). 여기서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정치․경제체제를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개혁해 나가는 적극적인 사명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그림 속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들도(막 12:16,7; 요 18:36)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쉐이퍼가 잘 지적했듯이 모든 시민정부는 하나님의 법 아래 있으므로 만일 그 법을 어기면 그의 몫은 박탈당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할 권리가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16) 또한 ‘내[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자세히 보면 주님의 나라는 정치․경제 영역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직 영혼의 구원에만 적용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커크가 잘 간파했듯이 주님의 나라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모두 포괄하지만 세상나라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임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17)
마지막으로 교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적이(of the world) 되어서는 안 되지만 세상 안에(in the world) 있어야 합니다(요 17:15, 16, 18).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완전히 부정하거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세상에 도전하여 변혁을 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스토트는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iness)라는 말로 적절히 표현했습니다.18) 그런데 바울의 선교를 통해 세워진 어느 정도 제도화된 교회는 사회참여에 무관심한 듯이 보여 교회사 속에서 오랫동안 교회의 발목을 정치적 무관심 속에 붙들어 매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에 대한 철저한 오해에 비롯된 것입니다. 신약학자인 리처드 롱게네커는 바울이 비록 직접적으로 노예 제도 폐지를 주창하지는 않았지만 폭발력이 잠재되어 있는 사상을 제시함으로써(엡 6:5-9) 그 목표를 향해 출발했다고 해석했습니다. 또한 바울의 급진적인 사회사상은 적절한 토양과 환경 위에 뿌려져 자랄 수 있도록 준비된 씨알과 같다고 이해했습니다.19)
이런 맥락 속에서 보면 롬 13: 1-7의 말씀을 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합니다. 흔히 이 말씀은 모든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결국 교회의 정치적 관심을 최소화할 뿐 아니라 그나마 아주 보수적인 성향을 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시대와는 달리 교회와 구분되어서 그리스도인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답으로 주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의 답은 그 정치공동체를 떠나서 분리된 공동체를 만들지 말고 그 안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어떤 권세든지 무조건 순종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는 권세에 순종할 때 양심에 따라 하라는 말에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5). 쉐이퍼가 말 한데로 롬 13: 1-7에서 추론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면 국가에 불순종하는 것이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라는 점이다’.20) 이렇게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입증해주는 신학적 근거는 매우 단단합니다.
사회참여의 마지막 당위성은 현실인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정치 문제에 의식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을 때도 우리는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침묵은 곧 현 구조에 대한 지지로 이용될 수밖에 없고 그 구조는 나와 다른 시민들의 윤리적 판단까지 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회참여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하느냐 입니다. 더구나 불의한 사회구조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실질적인 사회생활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중대한 말씀을 실천하고 싶어도 실천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당위인 것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구약이 요구하는 정의는 현재의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교육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유익하다는 점입니다(딤후 3:16-17). 그러므로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정의를 실현할 것을 촉구하는 구약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가슴깊이 새기고 현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가야 합니다. 이 점이 한국교회 개혁에 중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맺음말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끊임없이 유혹 받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복음적 영성을 상실한 채 여러 가지 중병을 앓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교회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함으로서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 있으려면 복음적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먼저 순수한 영성 즉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삶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기보다는 살던지 죽든지 자신을 통해 주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로 온전한 영성 즉 이웃을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과 이웃사랑의 실천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전도, 사회봉사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제도와 구조를 변혁해 나가는 사회참여가 서로 입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혁을 이루려면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늘 읽는 것이나 예배시간에 설교시간이 강조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깊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능했던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한국교회에 너무나도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눈이 열릴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함으로써 끊임없는 개혁에 정진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한국교회의 새벽을 깨울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위대한 정체성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길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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