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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알 파 코 스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이 채워지는가?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이 채워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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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글 | 2007/06/16 (토)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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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그 빈마음속에 하나님이 채워진다'는 식의 위험한 생각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전 인격적으로 죄에 오염된 인간이 단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깨끗해지고, 겸손해져서 하나님께서 그 속에 채워지십니까?

성령께서 우리가 마음을 비워야 성령께서 안에 들어오시고, 거듭나게 하신다는 이상한 인과적 논리이다. 이것이 구원의 주체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이다.

이것은 불교나 힌두교의 자기 수련을 우리 기독신앙의 거룩과 혼동하는데서 오는 착각이다.  

마음을 비운다고해서 하나님보시기에 우리가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비워질 수도 없다.
인간이 마음을 비운 것처럼 스스로의 자아도취의 착각속에 빠지는 것 뿐이다.

크리스챤은 신앙적 의미에서 '마음을 비운다' 이런 용어를 써서는 안되며, 빈 마음속에 성령을 채운다라는 비성경적 개념을 얘기해선 안될 줄로 압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라는 말만 바꾸었지, 범신론적인 용어 오염이다.

거듭남이란 우리의 죄악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모습 그대로에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구약적 개념으로 보면 죄악이 판치는 가나안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간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세워가는 개념이다.

칭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깨끗해지고 의로워지도록 노력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우리가 모순과 죄있는 그모습 그대로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고, 의인으로 여겨주셔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신앙역사를 보세요..구원받는 사람들이 미리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준비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까?

그런데, 요즈음 한국교회에 몇몇 몰지각한 목회자들에 의해 관상기도라는 이상한 풍조가 들어오고 있다.

그들이 인용하는 것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 3절은 무슨 기도라든가 관상기도를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마태복음 5:3절은 원문상, 인과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복이란 무엇인가? 구원을 뜻한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 이런 상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이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위축되고, 영적으로 파산된 사람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말로, 마음을 비운다라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인간이 마음을 비우는 인위적인 관상이란 수단을 통하여 신과 인간이 합일할수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없이도 인간이 수련과 기도를 통해서 제멋대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오만한 사상을 낳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짓이다.

이러한 사상은 2세기때 몬타누스 주의와 중세때 클레르보의 버나드나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또 수도원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신비주의는 인간의 영혼이 혹은 영혼의 섬광이 신적인 성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본래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 얼마나 하나님앞에 건방진 사상인가?

인간존재 깊은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현존을 접하여 그 사랑에 의해 사로잡히고 경이롭게 변형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 본성과 일치하자는 것이다.

특히 버나드는 하나님을 사랑을 향유, 음미한다 하면서 그를 주목하는 입맞춤의 신학을 통해 관상기도를 신비주의적으로 발전시켰다.

우선 그의 영성에 대한 관념 속에는 금욕적 형태의 신비주의 요소가 깃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육(肉)에 죽고 영(靈)에 살자’고 함으로서,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죄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같은 그의 이원론적 관념은 그의 생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같은 신앙관은 신자에게 있어서 신앙과 생활의 분리를 가져오는 신비주의로 향하는 관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적인 이해대신 이런 이원론적이고 금욕적 인간 이해는 신자의 정상적인 삶에 큰 위험을 안겨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버나드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우리나라에선 이용도씨이고, 그 밑에 유명화, 나운몽, 문선명, 박태선등이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신비적 무아경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영혼의 상승단계를 사모하였다.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경향은 사실 불교라든가 범신론의 신비주의에서 목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을 빙자한, 감상적 신비주의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얘기하지만, 자아최면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신비적으로 들으려고 하는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도와 다르다. 이것은
힌두교, 불교, 카톨릭 수도원의 영성훈련에서 볼수 있는 범신론적 기도행태다.
이 신비주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면의 모든 사고와 의지와 계획까지도 단절시켜야 한다. 완전히 자신을 비워 자신의 생각, 상상, 영상, 중보기도나 어떤 기도제목도 버림으로 세상과 단절해야 한다. 이런 내적 단절 외에 외적인 모든 세상 사건과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 이처럼 관상기도에서 단절과 분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신과의 합일을 최고 목표로 인간의 인격을 제하고, 영혼이 신과 접신한다는 신아의 세계는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는 비성경적 신비주의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한 마귀의 놀음에 놀아나게 된다.(고후 11:14)

예나 지금이나 신비주의는 오랜동안 신앙의 본질을 오염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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