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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 경 공 부

[스크랩] 구언약과 새언약에서 축복관의 변화

구언약과 새언약에서 축복관의 변화


1. 하나님의 공의를 통한 신구약의 연속성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속성으로 공의와 사랑으로 정의하고 있다. 특히 구약을 보자면 선인선과 악인악과, 인과응보의 사상, 행위에 대한 상벌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이러한 상벌이 뚜렷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은 우리는 알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로인하여 시편기자는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난받아야 함을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치더라도 의인이 결국엔 승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권세와 모든 은혜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고로 사단이 욥을 시험하고 욥이 인내로 갑절로 복을 받았다는 기사는 믿는 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갖게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지고 만다. 메시야도 땅에서 고난을 받고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서 실현되지 않고 결국엔 사형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다가 짧은 청년의 생을 마치게 된다. 더불어 그의 제자들도 유대교와 로마 정부의 엄청난 핍박으로 동일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너희에게 당하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여기지 말라'고 한다. 진정 구약의 공의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믿는다면 구약에서처럼 동일하게 실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대교인들은 죽음의 위협과 가난과 궁핍과 옥살이와 각종 핍박으로 만물의 찌끼와 같이 버림받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했다. 진정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하나님은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에 왜 뒷짐지고 계셨을까?
홍해를 가르고 바로의 수만의 군사를 멸하시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시고 다니엘의 불시험가운데서 건지셨던 그 하나님은 왜 잠잠하셨을까?


초대교인들은 이러한 생각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리셨고 바다위를 걸으셨던 그 하나님이심을 직접 보고 믿은 자도 있었는데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시니 아이러니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통한 신구약의 연속성은 분명 단절 내지는 변화가 있었다. 어떻게 변화가 있었길래, 대체 죽음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놓지 않았을지 생각해보았는가?


2.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 - 그림자와 실체


유대인들은 언약의 조건으로 가나안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할 때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강성해지고 외부의 침입이 없을 뿐더러 그 땅에서 평안히 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때는 이스라엘은 외부 세력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원방에 포로로 잡혀가서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장차 신약시대에 이뤄질 새언약의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한 것이다.  새언약에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천국을 받은 것이다. 이 천국의 모형이 바로 가나안이다. 그래서 전파된 복음을 천국복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유명한 산상설교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것을 연상케 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12제자를 세우시고 많은 다른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 땅에서의 성도의 윤리와 천국에서의 보상에 대해서 설명하신 것이 팔복과 산상보훈인 것이다.


성도는 땅에서 오히려 고난을 많이 받는다. 왜 그러한가?
인류의 조상 아담을 타락케 하여 모든 인간이 사단의 권세아래 놓이게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살아있을 때도 사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서도 음부로 가서 결국엔 사단의 기숙처인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육신하시어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모두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는 파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사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장차 재림의 날에 지상에서의 삶이 모두 끝이 나고 영벌의 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을 안 것이다. 이에 사단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심하게 핍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현실을 선으로 바꾸시는데 고난을 통하여서 금으로 연단함 같이 성도를 정결케 하시며, 고난을 도구로 하여 죄를 그치게 하시는 것이다. 진정 고난 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죄를 생각할 틈이 어디있는가? 오로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진실되이 의지하게 되고 땅에서의 나그네요 이방인된 삶을 탄식하며 장차 재림과 함께 임할 부활과 천국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고난 받는 것이 유익이라 이로써 주의 율례를 배웠나이다"라고 고백한 시편기자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벧전3:17)"의 베드로 사도의 고백들은 고난을 오히려 유익하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도들이 천국을 맛본 것은 주님의 초림시에 변화산에서의 주님의 변모된 모습에서의 그 영광을 바라본 것과 바울, 요한사도의 증언들이 그것이다. 특히 바울은 천국을 보고나서 땅에서의 삶을 금방 사라지는 들풀의 꽃과 같다고 비교하며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천국에서 보상 받을 상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없기에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라고 한다. 과연 천국이라는 곳이 얼마나 좋은 것이기에.. 만물의 찌끼 같이 버림 받은 생활 속에서도 기뻐하며 그의 전생애를 바쳤단 말인가?

 

3. 임박한 재림 - 종말론적 신앙


신약성경의 주제는 한결 같이 임박한 종말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부터 재림의 기간을 '말세'라고 표현하는 것도 임박한 종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이후에 지금까지 6000년의 시간과 비교해 본다면 말세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관념과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 왜냐면 재림이 2000년간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세라고 표현토록 하셨다. 또한 열처녀의 비유처럼 항상 깨어서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독려하시고 있으며, 오늘 하루가 지남으로 재림은 더욱 다가오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재림이 언제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3000년이 지나도 이 표현은 계속 될 것이다.


종말론적 신앙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도 연관이 있다. 진정한 구원의 완성과 진정한 공의가 심판을 통해서 이뤄질 시점은 오직 재림이기 때문이다. 말세의 기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성도라 할지라도 도무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으며 고통스런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주님은 "왕국이 임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던가? 진정 하늘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뤄짐 같이 땅에서도 그 공의의 섭리가 확연히 이뤄질 날.. 그 재림의 날이 속히 이뤄지길 우리는 대망하는 것이다.
 


4. 구약 유대교적인 언약사상으로 새언약을 가리우는 목회자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과 맺은 구언약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가나안 땅에서의 보상으로 한정하신 것이다. 이를 통하여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인 영적인 것이며 장차 이뤄질 임박한 재림에 받을 영원한 천국의 보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강단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천국복음은 구언약 사상으로 바뀌어서 오히려 땅에서 받을 축복개념으로 바뀌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깐 실체에서 모형과 그림자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행위에 대한 상벌이 즉각적으로 땅에서도 이뤄졌던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가르침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 대한 섭리를 이해시키는데 당연한 듯하고 신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할 때 그럴 듯한 이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는 이치와 같이 구언약과 새언약은 커다란 변혁의 과정을 겪어서 이로 인해서 제사법, 시민법이 폐하여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임박한 재림으로 변화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목회가 타락을 하다보니 부자와 권력자에게 그들이 축적한 부와 명예들을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정당화하는데 문제가 크다고 하겠다. 부와 권력을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서 획득하였는지보다는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 물질이 필요하다보니 그들에게 굽신거리게 되고 장로라는 직분을 신앙의 성숙도를 간과하고 부여한다든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미화하는 행위들은 하나님이 심히 미워하시는 배도적 행위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거둬들이기 위해서 당장 땅에서 들이 부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기복의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도 새언약에서는 당치도 않는 말씀이다. 오히려 땅에서의 은혜들은 쌓아두고 누리기 위해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로써 하나님께 선하게 사용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축복을 누리는가? 라고 묻는다면
어떤 행위에 의한 필연적인 상벌로서의 부,권력 등은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행위에 관계없이 신앙의 성숙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불신자들을 보라. 극악무도한 살인자들이 오히려 장수하고 땅에서 할 짓 다하고 살지 않는가? 임박한 재림앞에 당한 말세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서 갑절로 누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강단에서 설교하는 구약적인 하나님의 공의관은 이젠 멈출 때가 되었다.  

출처 :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글쓴이 : 카이로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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