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9)
하나님의 자살(Divine Suicide)?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허무주의자 쇼펜하우어의 말이 아니라, 기독교작가라고 할 수 있는 도스트예프스키의 말이다: “Every man who desires to attain total freedom must be bold enough to put an end to his life….Wheover dares to commit suicide becomes God”(그의 The Possessed 에 등장하는 한 인물 Kirilov의 말). 물론 자살을 권하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란 그렇게 한계지워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유는 어떠한가? 이 시리즈의 앞의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아니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must exist necessarily)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는 존재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곧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그 필연(necessity)에 매여 계신다는 뜻으로 들려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필연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필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그렇게 필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과연 그럴 절대자유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절대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살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절대자유를 증명해야 한다면 자신의 존재하지 않음으로서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살해야만 자신의 절대필연에서 절대자유한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게 무슨 망발인가! (이런 질문으로, 본체론에 기초를 둔 서구신학의 신론, 혹은 삼위일체론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은 복될진저! 물론, 너무 간단한 언급이지만, 윗글에 나타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제의 잘못도 암시하고 있다).
놀라지 말라. 그렇게 자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그리고 놀라시라. 그렇게 자살할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간 언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언약이 바로 “낳으심”이고, “나오심”이라고 하였다. 성부와 성자께서 “낳으시고 낳으시는” 바 되며, 또한 성부와 성령께서, 그리고 성자와 성령께서 “보내시고 나오시는” 이 관계-사랑의 언약, 언약의 사랑- 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자살하실 필요 없이도 절대필연으로부터“도” 자유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근거가 하나님되심이라는 “본체”(nature)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삼위의 “인격”(person)에 있다고 이해할 때에 이 일이 가능해진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삼위의 인격의 상호교제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호교제를 떠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부 없이, 성자가 없고, 성자 없이 또한 성부가 없다. 이것은 또한 성령에게도 적용된다. "낳으시는" 성부, "낳으신 바" 되는 성자, "보내시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나오시는" 관계를 이루는 그 세 분의 "인격"(person)이 없이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되심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되심이라는 그 “본체”와 삼위 하나님의 세 “인격”은 동시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에 그 논리적인 우선권을 두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천양지차로 바뀌게 된다. “본체”에 우선권을 두면 철학적인 하나님이 된다. 필연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자살함으로서만 그필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인격”에 우선권을 두면 성경의 하나님이 된다. 언약의 하나님이 바로 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서로를 뗄레야 뗄 수 없고 분리시킬 수 없으되, 서로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구분되는 인격(person)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비한 person의 개념을 한글로 번역할 때, “인”격이라고 하면 무언가 결함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신”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person되심을 어떻게 인간의 person됨에서 연유된 것처럼 이해할 수 있더란 말인가! 사실은 오히려 거꾸로이거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절대필연에서조차도 자유한 그 하나님께서 그 자유하심으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시는 일이 바로 그 분의 작정(decree)하심이다. 언약의 작정이고, 사랑의 작정이다. 그 분의 절대자유 가운데서 또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시며 언약을 맺으시고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구속하시는 대드라마를 작정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실 하등의 필요가 없는데도,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그렇게 행하시는, 절대 자유하신 그 분의 영원한 작정과 그 집행을 우리는 이제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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