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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알 파 코 스

알파코스 비평 - 호워드 데이비스

이글은 내가 비평하는것이 아니라  호워드 데이비스라는 사람이 비평한 글을 올리는것이다. 

 

런던의 브롬프톤에 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시작된 최근의 알파코스 운동이 성경적으로 잘 균형잡힌 현대적인 복음 전도 운동인가? 아닌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할것인가?  그것은 다른 새로운 전도 프로그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출판물을 읽어보는 것이 올바른 시작이 될것이다. 알파코스가 전 세계에 급속히 퍼져 나감에 따라, 수많은 교회들은 이것이 적절한 운동인가의 여부에 대해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알파코스의 기원

 

그들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알파코스의 기원은 1977년 브롬프톤의 홀리트리니티(HTB)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 원리들을 편안하고도 비형식적인 환경 속에서 새 신자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찰스 매언햄이라 불리는 성직자의 아이디어였다. 처음 소수의 사람들은, '예수는 누구인가?' "왜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등의 질문을 토론하기 위해서 매 주일 모임을 가졌었다.  매언햄이 이 운동을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그 모임에 일부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1981년 '성령주말'이 덧붙여지게 되면서 어떤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캠브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옥스퍼드에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는 니키검불은 5년전 HTB안수를 받고 성직자가 되었다. 그의 역동적인 지도하에서 알파 코스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91년 런던에는 600명의 추종자와 더불어 네 곳의 회합처가 있었다. 1996년 3월, 전 세계에 등록된 알파코스의 규모는 3,000여 곳의 회합처에 250,000여명이 참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호주에서 만들어진 광고물에는 1996년에 4,000여 회합처가 있다고 주장한다.<참고:메이저 데이비스는 이런 수치들을 재검토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수치들이 알파 운동의 유인물에 실린 그대로 옮겨 썼기 때문이다.>

 

선전활동

 

알파코스의 선전 활동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36쪽에 달하는 알파뉴스는 지금 교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이 그 전형적인 기사이다.

 

서레이의 패언햄에서는 구세군,감리교,성공회,가정교회,로만카톨릭 그리고 회중교회등 32개 교회를 대표하여 80여명이 리버사이드 교회로 옮겨 왔다.(알파뉴스 P4)

 

알파 뉴스에는 추천의 기사들로 가득 차 있다. 다양한 교파들과 다양한 신학 분야의 지도자들이 보내 온 글들이 여덟면에 걸쳐서 실리고 있다. 이런 지지자들 가운데는 캔터베리와 요크의 대주교, 제임스패커, 존윔버, 마이클 그린, 제랄드 코오츠,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리고 캔달등과 같은 저명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다.

 

또한 알파 뉴스는 과거 그리스도인이었거나 혹은 알파 집회에 참석한 이후 영적으로 새로워진 사람들의 성공담들과 개인들의 간증문들로 가득 메워진다. 여기서 발행하는 출판물 중에는 알파코스에 등록한 영국 전역(그리고 세계)에 있는 수천개의 교회들을 자세히 소개하는 작은 유인물 조각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알파의 서적들, 교육용 비디오와 카세트, 포스터, 티셔츠, 카 스티커 그리고 HTB 찬양집 등을 보면 우리는 알파코스가 실로 거대한 사업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또한 알파가 다음과 같은 의미임을 알게된다.  누구나 참여하여 - 배우고 웃으며 -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 서로 도우며 - 무엇인가를 기도한다.

 

현대와 같은 호옵의 시대에 이런 강력한 선전활동은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심없이 알파코스를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 분명하다.  이 시대의 목사들과  교회의 사역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한 가지 문제는,  최근래의 교회 성장 시스템을 촉진시키기 위한 홍보물들의 범람과 방문 강연자들과 전도 세미나 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알파 문헌들을 정독하다가 보면 그들의 성공담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알파코스는 놀라우리만큼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 회심자들의 뛰어난 간증문들을 읽으면 감동을 받게 마련이다. 지금 그리스도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전투적인 교회가 사실을 듣는다는 것은 큰 격려가 된다.

 

알파에 대한 평가

 

어떤 새로운 전도 방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거기서 어떤 교리가 가르쳐지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수치상으로 성공했다는 것이 반드시 그 전도 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럽게 성장하는 이단들(여호와증인이나 몰몬교와 같은)을 볼 것 같으며 그것을 알수 있다.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고 주장하는 교회 성장 위주의 실용주의에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알파코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노라면 이 운동의 급격하고도 광범위한 확산, 특히 영국을 가로지르는 확산을 곧 바로 인정하게 된다. 알파의 성경 교수법이 훌륭하다는 것 역시 알파의 문헌들을 읽어보면 뜨렷히 나타나고 있다. 니키 검불과 그의 팀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실용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성경공부, 기도, 그룹토론, 그리고 강제적이지 않은 친교 네트워크의 활용 등은 잘 균형을 이룬 복음 전도의 방법이다. 이 모두를 잘 활용하여 알파 코스는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열정이나 창의성이 없이 그저 유지하기에만 급급해 하는 분주한 기존 교회의 프로그램에서 너무나 쉽사리 간과해 버리는 부분들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얼른 보기에 전도 운동의 한 과정으로 알파코스는 높이 평가할 만한 면들이 많아 보인다.

 

초자연적인 은사들

 

그러나 알파코스의 가르침을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운동은 '초자연적인 은사', 특히 방언, 병고침, 지식의 말씀 등을 강하게 추구하고 있음을 곧 바로 알게된다.  알파코스에 참여하겠다는것은 지역에 있는 일반 교회들이 그런 '은사들'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겠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알파코스가 '토론토 블레싱의 발꿈치를 붙잡고서 부상하였다는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HTB의 지지자들은 전혀 다르게 주장할 것이다. 즉, '토론토 블레싱'에서 나타났던 미성숙성이 지금 내용면에서 영적으로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HTB에서 극복했다고 하면서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그 첫번째 과도함(토론토 블레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 역자 주)으로 인하여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두번째)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조심하라고 하는 경고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역

 

알파코스의 혼란적인 요소들은 니키검불이 지은 Telling Others(Kingsway)11장을 읽어보면 가장 분명하게 보여진다. '사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장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관한 알파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검블은 '사역'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존 윔버의 정의를 이렇게 사용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

 

'사역'이라는 용어는 은사 위주의 많은 모임들에서 발견되어지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느 공예배에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시간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작은 팀들의 지지를 받는 집회의 인도자에 의해서 수행된다.  이러한 '사역'에서 보여지는 가장 일반적인 세가지의 현상들을 방언 말하기, 병고침 그리고 지식의 예언적 말씀 등이다. 흔히 '사역'은 회중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주장한다.(이것은 정기적으로 반복되며, 그리하여 예배의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됨).

 

그리고 나서 검블은 성경을 이상하게 주석해 나간다. 모세가 홍해를 향해 손을 뻗은 출애굽 기사로부터 그는 이제 '사역'에서는 회중들이 모세처럼 그들 자신의 손을 내어 뻗는 행위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Telling Others. p124)

 

성령주말

 

알파코스에 있어서 '주말' 혹은 성령의 날은 그 운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 라고 묘사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시간에는 성령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과 함께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관한 많은 부분이 다뤄진다.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가?' 그것은  '안수사역'을 통해서 분명 그 절정에 이른다.

 

니키 검불이 가르친 ' 사역'은 그 자신의 말로서 이렇게 평가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그를 마주본다. 만약 그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눈을 뜨고서 성령께서 임재 하시기를 간구한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증거들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인도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긴다.(Telling Others. p129)

 

 이 사적인 사역에는 두 세 사람이 참여한다. 그 안수 기도를 주시하는 눈들과 안수하는 손들은 모두 강도를 더해 간다.  이 사역에 참여하느 사람들은 성령의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검블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확신한다'(p130) 곧 이 '성령주말'의 목적은 보다 분명하게 밝혀진다.

 

알파의 주말모임에서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그것은 방언이 가장 중요한 은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알파코스는 새 신자의 운동이며 또한 방언의 은사가 새 신자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도 아니고 성령충만에 있어서 꼭 필요한 상징도 아니다. 방언의 은사는 당신을 영적 엘리트로 격상시키지도 않으며, 꼭 방언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경과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때때로 그것은 신자들이 받게 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첫번째 뚜렷한 은사임은 분명하다. (T

(Telling Others. p129)

 

'알파코스는 새 신자의 운동이며 방언의 은사는 새 신자의 은사이다.' 이 말은 부인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중심 되는 주장이다.  그 후 검블이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함으로서 특히 더 그러하다. '신약 성경을 우리가 이해해 볼때, 그것(방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느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큰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Telling Others. p129-130)

 

방언

 

그 때 검불은 '방언의 은사'를 받는 방법을 이렇게 요약해서 말했다.

 

사람들이 방언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나는 가장 큰 장벽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심리적인 것이다. 그 장벽은 첫마디(방언)를 함으로써 극복된다. 일다 ㄴ그 사람이 첫 마디 방언을 하게되면 그 다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장벽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그 어려움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들이 나의 기도나 혹은 다른 기도 사람들의 방언 기도를 따라서 그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일단 첫 마디르 시작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드 ㄹ혼자서도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말로써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절차는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만약 그 '방언의 은사'가 진정으로 성령이 주신 것이며 또한 그것이 '초자연적인'것이라면, 왜 어떤 단순한 '심리적인 장벽'이 첫 번째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성령이 그렇게 무력하다는 말인가?

 

더 나아가서, 여기에 나오는 검블의 용어 선택은 정당하지 못하다. '첫 마디가 이뤄지게 되면'이라고 했지만, 분명 그가 뜻한 것은 '모방'이다.  '그 다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했지만, 사실상 '자연스럽지 않게 이어진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지도자 훈련 교범 8쪽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언어로 말하도록 그들을 격려해 주라.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라.'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이런 방법으로 구푸려서 발버둥쳤으리라고 상상하며 헛되이 씨름한다.  그런 방법론을 사려깊게 평가해 보면, 그 행위의 전 과정을 통하여 자기 암시, 모방, 감정적인 압박 등이 주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하는 결론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자연적인 '병고침'과 '지식의 말씀'에 대한 검불의 가르침들에도 '감명'과 '연민의 아픔'과 같은 이상한 주장 속에서 이와 유사한 측면들을 보여준다.(p136)

 

알파코스의 가르침이 그렇게 생동적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때, 거기에 몇 가지 좋은 측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초적인 요건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검블은 11장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알파코스'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핵심적인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사실 알파코스라고 할수 없을 것이다.'(Telling Others. p138)

 

능력전도

 

1장에서 검블은 톰린의 '세 가지 전도모델'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고전적인것' '성스러운것' 그리고 '능력 전도'로 일컬어진다.  검블이 상당할 정도로 발전시켜 나간것은 바로 윔버의 '능력 전도'모델이다.(pp 23-27)

 

이 굉장한 '능력의 병고침과 기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서이경적인 선례들을(특히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사용하지만, 그런 신학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무시하고 한 본문만을 떼어 내어서 살펴보는 데서 연유한다.  이 방법에는 자주 취급되는 본문 가운데 하나는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이다.

 

문맥에서 완전히 단절되어진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병을 고쳐 달라고 하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구출해 주실것과 물질적인 풍요를 주십사고 당연히 요구 할 수 있다. E.W. Kenyon, Kenneth, Copeland,와 같은 이들이 가르친 '병고침과 풍요'의 복음의 배후에는 이런 오류가 자리잡고 있다.

 

단절된 본문

 

어떤 교리가 단절되어진 한 본문만을 기초로 해서 형성될 때는 언제나 오류가 생겨나기 쉽다.  마16:27, 25:31-46, 롬2:6과 같은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쉽게 입증될 것처럼 보여진다.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고, 또한 성경은 모순처럼 보이는 본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결정해 준다.

 

요14:14의 경우,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다른 구절들과 비교해 보면 금방 바른 균형성이 드러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심지어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고 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우리들의 이런 기도의 모습이, '언어 신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때로는 '믿음의 결핍'이라고 무시당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 하시기를 간구하면 그분이 오신다.'고 한 검블의  진술을 보면 검불 그 자신이 오류에 빠진 것으로 보여진다.

 

요한복음 14장과 앞 구절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가끔 동일한 오류가 발생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김이니라"(요14:12) 검블은 "이보다 더 큰것"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활동의 한 부분과 좋은 소식에 대한 증명으로서 성령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Telling Others. p26)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고전 1:22-24에서 바울은, 복음의 유효성에는 그 어떤 것도 첨가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해서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검블은 윔버의 어설픈 '능력 신학'을 흉내내고 있다.

 

공통적인 끈(Common Thread)

 

알파코스가 교파와 신학적인 장벽을 쉽게 넘나든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타협되고 있다고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든다.  특히 카톨릭과 앵글로 카톨릭(Anglo-Cahtolic)의 기록을 보면 그렇다. '새로오는 사람들은....처음에는 미사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궁극적으로 여러 갈래의 교회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적인 끈이란(신학이 아니라)알파코스의 은사적인 내용이다. 교리의 실제적인 결과는 겉치장 뿐이다.

 

요약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빨리 알파코스를 받아들이고 또한 알파의 원리를 채용하는 일부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을 때, 알파코스의 방법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최근에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냉정한 관찰자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분명 그것은 아니다.

 

장구한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설교의 내용에 진리와 오류가 뒤섞여 있었던 일부 시대까지도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약함과 과실(심지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과실)을 이기고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풀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오류를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삶의 순결만이 아니라 교리의 순결을 위해서도 이러한 것들을 검토해야만 한다.

 

알파코스에 참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호기심을 시험하는 지혜로운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 알파코스에는 첫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근래 '토론토 블레싱'이 감정적인 과도함과 건전한 신학적 결핍이 보인데 비해, 알파는 훨씬 더 사려깊은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이 지나야 알파 코스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다.

지금 성장하고 있는 이 전도 프로그램에 대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주의 깊게 분석할 필요를 느낀다는것은 현대 교회의 상황에 대한 슬픈 반성이다. 

 

이와 유사한 어떤 실제적인 전도 방법이 출현됨으로써 분명 우리 모두는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다만 알파라는 포장속에 담긴 위험한 장식들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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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비평은  아주 객관적으로 과격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나는 좀 과격한 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과격하지 않는 표현들 속에 얼마나 무서운 경고들이 들어있는지 영으로 깨어있는 자들은 알게될것이다.   알파코스는 부드러운 독약이다. 먹을땐 맛있어 보이지만 결국 목숨을 앗아가는 독약과 다름없다. 

 

맛있는 독약이라고 몸에 좋은것이 아니다.  교회를 죽이는 것이 알파이다.  이 맛있는 독약을 맛있다고 설명하고  모두에게 먹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몸된 교회를 죽이고  머리된 주님의 몸에서 분리하려는 수작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  그 몸을 죽게 놔두지 않을것이다.  나는 주님의 역사할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