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어떤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전 늘 많은 사람들로부터 옹고집이 있다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정말 옹고집이 있는지? 아니면 나의 주관이 옹고집처럼 느껴지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웃에게 자존심을 내걸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포기하고 주님께 나를 맡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존심을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중에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자존심입니다. 교회안에서 자존심을 죽인 사람들이 별루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예수님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별루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전 교회안에서 좀 왕따입니다. 정말 많은 왕따를 당하고 좀 외롭습니다. 요즘은 교회를 자주 나가지 못하니 왕따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예전 교회에서 정말 열심히 활동할때는 왕따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키가 작은 내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키가 좀 작아서 인기가 없습니다. 돈도 많고 신앙도 좋은데 이상하게 여자친구가 없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는데 물론 키가 작은것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교회안에서 많이 퍼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풍성하게 베푸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혼기가 다 지나도록 결혼을 못하고 있는데 하루는 여자애들이 모여서 걱정을 하는 겁니다. **오빠가 참 결혼해야하는데 왜 여자가 없을까? 이 자매들은 친구보다 4~5살 정도 어린 자매들입니다. 충분히 내 친구의 반려자들이 될만한 자매들이죠. 걱정해주는 자매들에게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오빠라고 생각하면 너희들이 한번 생각해봐"
이 한마디로 전 그 자매들에게 완전히 찍혀버렸습니다. 더이상 그 자매들과 말을 나누기 힘들정도로 사이가 벌어진것이죠. 이런식이었습니다. 교회안에서 누군가를 위하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정작 자기는 할수 없는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간질병이 있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매를 챙겨주지 못해서 정말 죄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그 자매는 부모님들로 인해서 집밖을 제대로 나가보지 못했고 친구들도 사귀지 못하고 그래서 발달이 조금 늦었습니다. 저보다는 나이가 위였죠. 그 자매가 교회안에서 좀 외로웠습니다. 말도 어눌하게 잘 못하고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해서......
제가 그 또래 자매님들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챙겨주세요. 놀러갈때 그 자매 빼놓고 가지말고 좀 대리고 다녀요."그리고 전 그말한마디로 그 또래 자매들에게 욕 많이 먹었습니다. "너 말에 칼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죠.
왜? 무엇때문에 교회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할까요? 물론 부족하고 연약한 형제들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자매들의 인생을 책임지고 결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는 것일까요? 기독교인들은 담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소통이 막혀있으면 안됩니다. 자존심을 내세워서도 안됩니다. 부족한 사람이 내 친구가 될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독교인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잘살고/잘생기고/많이 배우고/좀 능력있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어야 대우도 받고 인정도 받고 사람들에게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삶에도 많은 보탬이 됩니다. 그래야 좋은 배우자도 만날수 있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기독교인들은 달라야합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은것처럼 능력있는 사람들도 자기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싶어한다는걸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누구를 친구 삼으러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이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더 위대하고 능력있고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은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자 오셨지만 그가 이땅에 오셔서 친구삼은 사람은 잘날것이 없는 정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백부장도 천부장도 세리도 부자도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수없었지만 자기가 잘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친구가 될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병든사람 가난사람 소외된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가난하고 애통하며 긍휼해야합니다. 잘나고 부자고 슬픔이 없으며 이웃을 위해 애통함이나 위로함이나 긍휼함이 없다면 예수님의 친구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옛성품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쩔수 없겠지만 예수님을 깊이 깨달아갈수록 자존심은 사라지게되고 세상을 향해서 낮아지게됩니다. 세상을 섬기는 자들이 됩니다.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가는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것은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되는것입니다. 세상을 섬기려면 낮아져야하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삶은 정말 어렵고 힘든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교회안에서 실천해야합니다. 가난한 아프리카로 갈필요 없습니다. 동남아나 중동으로 갈필요도 없습니다. 시골이나 농촌으로 갈필요도 없습니다. 가야한다면 그곳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보낼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지금 이 현실 지금 이자리에서 실천해야합니다.
교회안에 상처받은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지 마십시요. 혹시라도 앞에서는 살랑거리고 뒤에서 흉보거나 뒷담화를 까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여서 어떤 한사람을 흉보는 그순간 가장 슬퍼할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자들이라면 누가 누굴 흉보는 자리에 있다면 한마디 해야합니다. 우리는 그럴자격이 없습니다. 그런일이 교회안에서 부지기수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안에 사랑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위로받지 못하는것입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불신하는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혹 내가 누군가를 비방하는데 앞장서지 않았는지? 제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할것입니다. 혹 그러했다면 회개하고 뉘우치고 바로서야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인간의 성품이 악하니 그럴수 있습니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를 또한 책망해서도 안됩니다. 깨닫도록 알도록 해야합니다.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진보에 따라서 그 성품이 변화하기 때문에 지금은 깨닫지 못해도 나중엔 깨달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낮춘 사람들이 교회안에 가득찰수록 교회는 사랑으로 넘치게 될것입니다. 내가 변화해서 내가 그렇게 산다면 나를 통해서 한사람이 또 변화하고 그렇게 변화하는 사람이 늘어나게되면 교회는 주님앞에 바로서는 모습을 갖추게 될것입니다.
남에게 자존심을 굽히라고 말하기 이전에 지금 이순간 나부터 주님앞에서 그리고 이웃들 앞에서 내 자존심을 굽히고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며 섬김과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이 된다면 세상이 변하고 교회가 세상안에서 칭찬을 받게될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되는 자존심이 있으니 그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인것입니다. 참 믿음의 자존심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존심은 포기하면 안되겠지요. 우리 기독교외에 어떤 종교가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참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포기할 수없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비방하고 비판하고 그들을 나무라고 그들을 험담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들은 불쌍한 영혼들이니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긍휼함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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