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를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야합니까? 라고 질문을 던질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사영리를 통해서 전도를 받거나 아니면 친구 이웃들을 통해서 교회에 출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출석하고 친분관계로 인해서 교회는 다니지만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을겁니다.
이렇게 이곳에 와서 진리를 알기 위해서 공부도하고 글도 읽고 그리고 신앙생활하면서 감동을 받은 그 간증들을 글로 남기기도 하고 그리고 궁금증을 해결하기위해서 질문을 던지기도합니다. 너무 큰 은혜를 받은 분들은 신학교에 진학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다짐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믿은것이 자랑스러워서 남들앞에서 교회다니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하고 남에게 예수님 믿으면 천국가고 복받고 병낫고 축복을 많이 받는다고 큰소리 치기도합니다. 그는 그렇게 축복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기독교인들은 참 어렵게 살더군요 아이는 자폐증에 걸리고 남편은 불구가되기도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살림이 나아지지도 않고 자녀들은 비뚤게 자라고 공부도 못하고....그런 내 가정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것같이 생각되기도 하는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나아지는것이 별루 없고 어려운 삶은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은 종이 주우며 다녀야 하고 그렇게 어렵게 사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때 가슴에서는 슬픔이 울컥 쏟아오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만큼은 포기할수 없는것이 어쩔때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울때가 한두번이 아닌경우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세상에서 외롭고 고통받으며 외면받고 안티들의 욕까지 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까지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떠나지 않으며 힘든 삶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것이 우리들의 모습임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것 그것이 왜 내맘대로 되는것같으면서 또 내맘대로 되지 않는것처럼 느껴질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서 그 나라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이땅에서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고난의 삶입니다. 요즘은 신앙생활하면 복받는다고 전도를 많이 들어서 신앙생활이 고난이고 어려움이고 훈련이고 연단이라고 말하면? 괜히 예수님을 믿었나? 하고 교회를 떠나버리고 싶을때도 있습니다. 몸은 떠나고 싶은데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떠나지 못하고 탕자처럼 언제나 교회에 머무르는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고 싶으면 먼저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것이 무엇으로 인함인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먼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기에 예수님이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제가 해드릴수 있는 말은 딱한마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요.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십시요. 라는 말밖에 드릴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마음을 비우십시요.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그냥 받아들이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것은 우리가 의지로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의지 이전에 생명이 더욱 중요한것입니다. 우리안에 성령님의 중생케 하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우리가 가진 지,정,의로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느낄때 하나님을 인정하고 복종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집을 부리고 우리안에 있는 고집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대항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안에 교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의문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오랜시간을 우리를 교육하시고 연단시키십니다. 그 연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믿는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앞에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것입니다. 신앙고백은 내가 하는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안에 있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가 할수 있게되는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복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가 그 복음을 알게되고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되는 역사가 일어나는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들을때 바르지 못한 복음을 들을때 차이점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애쓰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알기보다 유희를 위해서 친구때문에? 부모때문에 거짓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혼동되고 어지러울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받는것보다 세상의 기쁨을 더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마음으로는 천국에 가고 싶은데?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니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시험이라고 하면서 그런 시험은 마귀가 주는것이라고 마귀를 대항해서 싸우라고 합니다. 마귀를 대항해서 싸우는것을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식으로 대항하라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과연 이런것이 우리가 마귀를 대항하는것인지? 아무리 그렇게 해도 사탄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나를 이겨서 끌고 가는것처럼 느끼고 우리는 여전히 죄가운데서 헤메이고 있다는것에 좌절감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신앙이라는것은 내가 원해서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사족이 너무 길었지만 기독교에서 구원은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물? 나는 받고 싶지 않은데? 가끔 맘에 안드는 사람이 선물을 주면 우리는 그 선물을 거부하기도하고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합니다. 나는 그 선물을 받고 싶지 않아서 거부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선물을 주셨고 나는 그 선물을 감사하게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에서 부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첫걸음부터 어긋나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거부할수 있는 그런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물을 받거나 거부할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때 이미 그 영혼은 죽었고 스스로 살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도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양을 죽임으로 피를 흘려 아담의 죄를 덮어줌으로서 예수님깨서 아담을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려야 했음을 가르치셨고 아담은 그것을 믿음으로서 죽은 영혼이 다시 생명을 얻게되는 은혜를 입은것입니다.
가인은 생명이 없는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가인은 생명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이해하지못하고 아벨을 죽여버리는 죄를 범하게됩니다. 아벨은 생명을 죽이고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림으로 예수님이 피를 흘려 자기의 죄를 사하실것을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가인으로 부터 죽음을 당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게됩니다.
곧 인간의 본질은 이미 죽은자라는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원죄로 인해서 이미 사망의 몸을 입고 태어나는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있는것같지만 영혼은 이미 죽은자로서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찾을수도 없는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인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과연 선물을 거부할수 있고 거부하지 않을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인간은 선택할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는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작정하심으로 가능한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잘 읽어보십시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분들은 이구절만 잘 알지 이 구절이 나오기 이전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속에서 나온것을 잘 모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으로 난사람 곧 거듭난 사람은 어떻게 거듭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믿는것이 내맘대로 되는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중생케 하는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것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구원이라는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동의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거듭난자들은 그 구원을 거부할수 없기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세주고 고백할수 밖에 없게된것이라는것입니다.
구원을 말할때 어떤 거짓교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죄가 있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온전히 모든 죄를 회개하는 역사가 없으면 중생함도 없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것이다." "나는 죄가 없다" "죄가 티끌이라도 있으면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을 믿는자들은 죄를 짓지 않을수 있다" "성령님이 함께 하면 결코 죄안에 거하지 않는다" 이런식으로 속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다고 죄안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 못한것입니다.
어떤 거짓교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는다" "착한 행실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수 없다" 이런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옳은말처럼 느껴지지만 결코 옳은 말이 아닌 속이는 말임을 아셔야 할것입니다. 죄를 짓지말라 착하게 살아라 이런 말은 아무리 들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뒤에 오는 말이 틀린것입니다. 이는 조건입니다.
기독교는 조건을 가진 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을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기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는 착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라고 말하거나 저사람은 착한사람이니 하나님이 구원하실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들 어떤 조건이 있기에 하나님이 구원할거라고 말하는것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것입니다. 아무리 악한자도 하나님은 그를 구원할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한자는 곧 생명을 가진자는 옳은 판단을 할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따라갈수 있습니다.
율법이 생명이 있기전에는 아무런 활동도 할수 없고 율법이 존재해도 그 율법의 존재자체를 우리가 알수 없지만 생명을 가진이후에는 율법의 용도를 알게되고 율법이 원하는것을 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인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죄아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생명을 가진자들이나 깨닫지 생명을 갖지 못한자들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알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정죄하여 죄아래 있음을 알게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그 죄를 씻음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것을 알게 하는것입니다.
유태교와 기독교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유태교와 기독교는 결코 다른 종교가 아닙니다. 유태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이라고 하면 유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라고 믿지 않고 있는것이고 기독교는 그것을 믿고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게 하신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이 우리를 보고 질투하여 하나님이 보낸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결국에 가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고 구원을 얻을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144000명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숫자는 이방인을 말하지 않고 구원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는 숫자임을 기억하십시요. 많은 이단들은 144000명을 기독교인들의 전체 숫자라고 말하면서 이 숫자안에 들어가기위해서 전재산을 팔아서 교주에게 바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유대교의 하나님이나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단 다른건 성자하나님을 우리는 알고 믿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 구세주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천주교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정통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이땅에서 몰아내는것이 그들이 꿈꾸는 세상입니다. 왜 그러냐면 오직 진리를 아는 자들은 바로 정통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만 몰아내면 이땅을 자기들 천국으로 만들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발악해도 하나님의 성령님이 그들의 발호를 막음으로 지금까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계시는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기독교를 지키지 않았다면 벌써 이땅은 천주교 곧 바알의 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천주교의 역사를 제대로 아시는 분들이라면 천주교가 기독교를 파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애씀이 있었는지 알게될것입니다. 요즘 기독교내에 불고 있는 열린예배/ccm/경배와찬양/신복음주의/성령운동.....이런 등등의 기독교 운동들이 바른 기독교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천주교에서 기독교에 심어놓은 가라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될것이니 바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대로 바벨론의 음녀의 그 거대한 음모가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깜짝 놀랄것입니다.
기독교는 성령님의 역사로 중생한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이는 이미 저주를 받아 사망의 몸을 입고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사람을 하나님이 어여삐 여겨서 생명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게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어 구원을 얻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것입니다.
곧 기독교는 자랑이 없는 종교이며 교만이 없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조건이 있음으로 구원을 얻은것이 아니라 조건없이 구원을 얻었기에 구원을 받은것을 자랑할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도할때도 조건을 걸고 전도해서는 안되지만 우리가 미련하니 어쩔수 없이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할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전도의 미련한 방법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 미련한 방법이지만 성령님의 역사를 간구하며 복음을 전파할때 인격을 가진 성령님이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준 모든 생명들을 그리스도앞으로 인도하여 낼것입니다.
그리고 교만이 없다는것은 결국 구원이 내힘으로 되는것이 아니니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자랑할수 없고 잘난체 할수 없으니 결국 우리는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할수 밖에 없는 존재인것을 깨닫는것입니다. 하나님없이는 구원함이 없으니 어찌 우리가 교만할수 있겠습니까?
구원이라는것이 내 힘으로 되는것이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자랑해서도 안되고 믿는것을 티내서도 안되는것입니다. 전도한다고 하면서 티내면서 전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모욕해서도 안됩니다. 전도자를 거부하는 자에게 신발의 먼지를 털어서 증거로 삼으라는 것은 말로서 하지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실일이니 조용히 전도를 거부할때는 그냥 나오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참으로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종교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생명을 가진자들에게는 기독교가 또 너무나 쉬운 종교입니다. 믿지 않는자들 곧 생명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기독교는 설명할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는 기독교는 너무나 쉽게 설명이되고 이해가 되는 것이 기독교인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자들에게 착하게 살라! 거룩하게 살라! 경건하게 살라!고 말하지 믿지 않는자들에게는 결코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왜 하나님은 믿지 않는자들을 심판하냐고? 반문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할일은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기 일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시는것에 우리가 어찌 고개를 들고 하나님에게 감히? 대항할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면 그렇게 하지 않을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할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며서 설교하시는걸 볼때 마음이 답답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도데체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삶이 도데체 뭐란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구제? 사랑? 기쁨? 교제? 나눔? 평화? 도데체 뭐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목사님들이 이렇게 설교할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그러면 도데체 십자가를 지는 삶이 뭔지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딱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잘난체 하지마라" 어쩌죠 제가 너무 잘난체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좀 어렵기는 합니다. 좀더 쉽게 이해하기위해서 "자존심을 버려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좀더 이해하게 쉽겠죠.
기독교인들은 잘난것이 없고 자존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해하실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해습니다. 죄에 대해서 이미 죽고 의에 대해서 산사람이라고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서 죽은자고 의에 대해서 부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잘난체도 못하고 자존심도 내세울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삶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좀도 이해하게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앞에서 내가 구원받을 조건이 있어서 구원받았다는것을 일찌감치 포기하는것입니다. 사람들앞에서 우리는 자랑할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것을 자랑할수 있겠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서 선택받은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워도 안됩니다. 자존심을 내세운다는것은 내가 잘난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빌리보서 2장입니다. 5절~7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비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나님으로서의 존귀함과 자존심을 버리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바로 죽은자의 모습으로 나가야합니다. 자존심을 버려야하고 아는것을 포기해야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을 위해 죽으심으로 그 큰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큰 사랑은 바로 죽는것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을 죽여야합니다. 우리의 자랑을 죽여야합니다. 우리가 죽을때 우리의 이웃은 삽니다. 이웃의 자존심이 살아나고 그들은 그 자존심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갈수 있게될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고 그 죽으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할수 없음으로 구원의 자리까지 나오게 된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습니까? 바로 그들은 율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받았다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여 만국의 제사장 나라로 삼았고 그들로 만국이 복을 얻도록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복을 자기들만 가로채고 이웃은 죽든지말든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 곧 이방인들을 향해서 선민이라고 하여 멸시하고 구박하고 그들의 위에 군림하여 섬기지 않고 오히려 폭군처럼 날뛰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불의를 보고 그들에게 고난을 주셨고 수천년간 나라없이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거부하자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그 복을 주시고 이방인들이 구원받는것을 보고 자기 백성들이 시기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랬지만 거부함으로 복음이 온땅끝까지 전파되게 된것입니다.
복음은 결국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까지 전파되어야 이땅은 끝이 올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복음이 중동까지 전파된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경영하고 이 지구를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심으로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지만 불의한 인간 죄로인해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결국은 심판의 자리까지 나가게될것이고 이땅은 그 죄악이 관영해짐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결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서로 통하는 관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입니다. 하늘의 별과같이 셀수 없는 수없이 많은 후손들이 있을거라고 약속한 하나님의 그 약속이 우리들로 인해서 이루어진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했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된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사랑하신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심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을때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어떻게 삶이 바뀔까요? 바로 세상을 향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스데반처럼 내놓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을때 똑같이 한말이 기억나십니까? 누가복음 23장 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사도행전 7장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성경말씀에서 느끼는것이 무엇입니까? 비록 사람들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는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이지만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는지 스데반집사를 죽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집사는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고난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고 핍박을 받고 외로움에 처할지라도 우리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도 나에게도 또 이웃에게도 돌려서는 안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알지만 세상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우리는 긍휼의 기도를 올려야 하는것입니다. 하나님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은 모릅니다. 그러니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하는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의 삶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이땅에서 선하고 착하고 이름있는 일을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세울것이 있고 자랑할것이 있는 삶이 아닙니다. 의를 행해서 구원받기 합당한 사람으로서 자랑할것이 있는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저들은 자기의 상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은 곧 자랑할것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불의한 자들이라고 칭한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행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25장 31절~이하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볼때 양은 자기가 한 선행을 기억하지 않았고 염소는 자기가 한 선행을 기억한 자들입니다. 결국 자랑할것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그 차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랑할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랑할것이 없다는 의미는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으로 인한것임을 고백하는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살수 없다는것을 고백하는것입니다.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르다는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잘난체 하는 사람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하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인것입니다. 타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자랑하지는 않는것같지만 결국 자기의 의를 가지고 신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교만 한자들인것입니다. 천주교도 불교도 스스로 의를 자랑함으로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하는것입니다. 결국 행위를 자랑하는 자들인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초보적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이여 진정 초보적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잘난것이 있다고 자랑하는것이 바로 초보적 신앙이고 신앙을 위해서 뭔가 종교적 열심을 가장하는것이 초보적 신앙인것입니다.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것이나 십일조를 잘내는것 율법을 잘 지키는것 일천번제를 하는것들이 바로 초보적 신앙인것입니다. 초보적 신앙을 벗어나는것은 자유하는 신앙인것입니다. 매여있는 신앙이 아니라 자유하는 신앙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는것이 참된 신앙인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절~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복음을 듣고 깨닫고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완전한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진보가 있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길게 글을 썼지만 아직도 초보적 신앙으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으니 길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요. 또한 이글에서 신론이나 성령론을 거론하지는 않았으니 우리 하나님을 더 자세히 알고 성령님의 하시는일 예수님이 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더욱더 깊은 교제와 나눔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감사하며 그 은혜를 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자기를 낮추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자랑함으로 글을 쓰고자 한것이 아니니 용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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