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딱한가지 아담의 죄악으로 인해서 희망이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이 불쌍해서 구원하러 오신것입니다. 아담의 죄를 속죄하기위해서 예수님은 죄없는 몸으로 오셔야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담으로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속죄양이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이유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잘난사람을 위해서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원이 필요없듯이 죄없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인간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로인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은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만이 죄인임을 깨달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자들을 부자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우리에게 주고자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자들에게 그나라를 주시겠다고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그 나라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이 맺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신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곧 생명나무실과가 있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이땅에 오신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께로 갈수 있는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에 이땅에 오신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그 나라로 갈수 있는 길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나라는 죄인들만 가는 곳입니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자기는 아무런 죄도 지은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갈수 없는곳입니다. 그나라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음을 고백하는 사람들만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그 죄를 고쳐서 그나라에 합당한 의인으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스스로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나라에 가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다 죽습니다. 스스로 영원히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만 그나라에 갈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것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만 가능합니다. 스스로 무능력하다는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가능한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땅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오신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그런분으로 믿는다면? 아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비결은 딱하나 이땅에서 우리의 문제는 결단코 해결되지 않는다는것을 깨닫는것입니다. 이땅은 문제 투성이입니다. 오류 투성이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머피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내뜻대로 되는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땅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수 없습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할수도 없습니다. 투명하지도 않습니다. 어둡고 불투명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아무리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것은 아닙니다. 항상 ?부호를 남겨두고 있는것입니다. 지금 병에서 고침받았다고 해도 내일 또 아픈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우리들의 몸입니다. 부자들도 가난한자들도 건강한 사람들도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도 문제 없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는것이 이땅의 현실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합니다. 당신들은 뭐하려고 예수님을 믿냐구!!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원하는건 우리들로 인해서 자기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뭔가 해답을 주길 바라는 마음이 그들의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땅에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과 답답함들 속시원하지 못하고 꽉 막힌것같은 삶들 숨쉬기도 곤란할지경까지 내몰리는 고통속에서 아픔을 견디어야 하는 슬픔들 이런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줄것같은? 그런 생각들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있습니다.
그 문제들을 기독교가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이땅의 사람들일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서 해답을 줄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줄수 있는 해답은 바로 이땅에서는 해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는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희망이라는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그것은 이땅에서 우리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사는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는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것입니다. 의롭게 사는것입니다. 착하게 사는것입니다. 자존심을 포기하는것입니다. 의롭다고 뻐기는것도 아닙니다. 잘산다고 자랑하는것도 아닙니다. 천국간다고 좋아하는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침묵하는것입니다. 묵묵히 내가 지고가야할 십자가를 지고 가는것입니다. 이땅에서 우리는 기대할것이 없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희망을 가질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하는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우리가 그 희망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쁘게 살아가야 하는것입니다. 기쁘게 죽음으로 달려가야하고 기쁨으로 핍박을 당해야 하는것입니다. 의롭게 살면서 핍박을 당할때 그 가운데서 기쁨으로 감당하는것입니다. 세상의 조롱에 우리는 웃음을 대답하는것입니다. 세상의 분노에 우리는 긍휼함으로 대답하는것입니다.
이땅의 사람들이 가질수 있는 희망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나라의 시민이 되는것입니다. 어떠한 문제도 있을수 없는 완벽한 나라 그 나라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것입니다. 이땅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질병의 문제도 그나라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빈곤의 문제도 그나라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나라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그나라는 변화된 순전한 성도들이 있는 곳입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곳입니다. 그나라는 마음의 아픔도 상처도 외로움도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죽음도 없는곳입니다.
그나라는 기적도 이적도 필요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보여주신 기적과 이적은 그나라에가면 이렇게 변화된다는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능력과 베품은 그나라에 가면 이런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것을 깨닫게 하시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우리가 소망을 두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전재산을 다 팔아서 귀한 보물을 사거나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밭을 사기 원하는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땅의 것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얻어야 한다는것을 말씀하고 계시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때 배고픈 사람들이 불쌍해서 배불리 먹이려고 기적을 베푸신것이 아닙니다. 그가 구세주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는 그나라를 바라보게 하기위해서 기적을 베푸신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순간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는것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순간의 배부름과 목마름을 면하기위해서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순간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가롯유다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돈궤를 맡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세상은 우리를 손가락질 할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핍박받는다고 말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회개해야 할것입니다.
십일조가 왜 문제가되고 헌금이 왜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창고를 짓고 곡식을 쌓아두면 뭐하겠습니까? 우리가 보험을 들고 미래를 대비하면 무슨 해결책이 됩니까? 우리는 어차피 이 땅 이 곳에서 잠시잠깐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가야 할 나그네 인생들인데 말입니다.
말로는 나그네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이땅에서도 잘먹고 잘살고 그리고 저나라에가서도 잘먹고 잘살기 바라는 마음.....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가는것이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것보다 어렵다고 했나 봅니다.
예수님을 믿는자들은 그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은자들입니다. 이미 그나라의 그의 의를 얻은 우리들은 더이상 일용할 양식에 매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풀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할때 우리는 빈곤해지지 않습니다. 손이 부지런하면 잘산다고 했습니다. 땅의 식물을 얻고 짐승의 생산으로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하고 그것을 나누어야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작은자를 돌보지 않는자를 책망하셨습니다. 작은자에게 하지 않은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부자가 되기위해서 작은자의 것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에 주지는 못할망정 뺏지는 말아야 하는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인생인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지 부자가 되기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자들의 삶인것입니다.
우리는 부자들을 욕합니다.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땅을 심판하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결코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 이땅에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야 할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욕심내지 말고 사는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일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삶이 바로 이땅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라는것입니다. 이땅을 사랑하면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될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겠다고 애쓰는 모습 아름답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돕는 자들 또한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것을 해결하기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받은것이 너무 커서 이땅에 내가 가진것을 다 포기해도 만족할수 있기에 내것을 포기하고 이웃을 돕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것입니다. 만약 이런 삶을 산다면? 그의 삶은 자랑의 삶이 아닌 바울사도가 말한 삶 곧 가난해도 부자여도 아파도 건강해도 오직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할수 있는 삶을 살수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를 잘 생각해봅시다.
그 이유 그 해답을 찾을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비판적 눈을 버리게 될것이고 세상을 포용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우리의 삶을 붙잡고 아둥바둥 사는것이 아니라 관조하며 넉넉하게 자유롭게 편하게 살아갈수 있을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나라를 이미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에게 걸림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것이 아닐까요?
로마서 8장 35절~39절 말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서 감동으로 고백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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