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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론


성경에서 언약은 열조의 언약과 율법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이 있다. 


열조의 언약

열조의 언약은 가나안 일경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이며 (창 17:17-18) 아브라함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성하여 대적의 문을 얻게 하며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창 12:3, 22:17-18) 이 언약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셨다. (창 17:19,21. 26:23) 그러므로 이를 열조의 언약이라 한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것으로 (창 22:18)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이라 한다.(신 4:31) 이 열조의 언약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은 약속으로 야곱은 택함으로 받은 것이다. 이 언약은 할례로 인을 쳤다. (롬 4:11, 창 17:11)


이 언약을 학자들은 구약이라 하나 이 언약은 영원한 것으로 영원을 신구로 나눌 수 없듯이 이 언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먼저 믿음으로 받은 것을 구약이라 하고 나중에 택함으로 받은 것을 신약이라 하지 않는다. 다 같은 것이기 때문에 열조의 언약이라 한다. 


이 할례를 받은 자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언약은 이삭과 세웠다. (창 17:19, 21) 그리고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 있었다. 이 두 아들도 다 같이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언약은 야곱과 세웠다. (창 26:2-3) 그러니 다 같이 할례를 받았다고 해도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에서와 야곱은 차별화하고 있다. 그러면 할례를 받았다고 해도 언약을 세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약을 세움 받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를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언약을 세움을 받은 자와 천하 만민이 다르듯이 언약을 세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는 다르다는 것이다. 


곧 다 같이 할례를 받아도 언약을 세움 받지 못한 자는 천하 만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은 언약을 세움을 받은 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방법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므로 받는 것이다. (창 12:2-3) 이렇게 아브라함을 인하여 이방인이 복을 받는 것을 바울은 복음이라 하였다. (갈 3:8) 그러니 택한 자를 통하여 언약이 이루어지고 이 택한 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언약에 복음을 믿는 자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택함과 복음은 다른 것이다. 그 예로 이스라엘을 예로 들고 있다. 복으로 하면 이방을 인하여 원수 된 자이나 택함으로는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었다는 것이다. (롬 11:28) 그러니 복음과 택함은 원수와 사랑처럼 다른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은 택함의 눈으로 이방인은 복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택함은 조상들을 인한 것이니 조상들을 인하여 받은 언약에 의한다. 그러니 유대인은 언약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율법의 언약

그리고 율법의 언약은 율법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율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곧 지키면 복이요 범하면 저주인 상벌의 율법과 상벌의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속죄의 율법이다. 


이 두 종류의 율법에는 각각 언약이 따른다. 곧 상벌의 율법의 언약과 속죄의 율법의 언약이다. 상벌의 율법의 언약은 지켜 행하면 열조의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범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 저주는 개인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이 있다. 민족적인 저주는 열국에 흩어진다. (신 28:36, 64) 열국에 흩어지는 것은 열조의 언약에서 쫓겨나는 것이니 할례가 무할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범죄도 무할례가 된다. (롬 2;25) 


이 심판으로 저주를 받아 열국에 흩어지면 열조의 언약에 차질이 생기나 열조의 언약은 영원하고 율법의 저주는 끝이 있어 율법의 저주가 끝나면 열조의 언약에 의하여 다시 돌아온다. (신 4:31) 돌아오면 다시 마음에 할례를 받고 (신 30:6) 열조 보다 더 복을 받고 살게 된다. (신 30:5)


율법의 저주로 열국에 흩어졌다가 돌아오면 새 언약이 세워진다. (렘 31:31)

이 새 언약은 첫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이다. 그러면 새 언약은 첫 언약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첫 언약은 율법의 언약이다. 그러면 새 언약도 율법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유대인에게만 있고 이방인에게는 없다. (롬 2:14) 그리고 언약은 민족적이다. 그러니 첫 언약이 유대인에게 민족적으로 적용되듯이 새 언약도 유대인에게 민족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 새 언약에서는 속에 새 영을 두고 새 마음을 주며 율례를 행하고 규례를 지키게 한다.(겔 36:26-27) 이것을 마음의 할례라 한다. (신 30:6) 이 마음의 할례는 상벌의 율법의 저주로 흩어진 열국에서 돌아와 받는 새 언약에 대하여 인을 치는 것이다. 이 새 언약에서는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지키게 하여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렘 31:33) 그러므로 새 언약 시대에는 저주가 없으니 다시는 열조의 언약에 차질이 없이 영원하다. (렘 31:40) 


그리고 속죄의 율법은 상벌의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법으로 동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린다. 이것은 제사를 드려야만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범할 때 마다 드려야 하고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의 저주로 열국에 흩어지면 제사를 드릴 수 없고 제사장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동물 제사로는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새로운 언약이 주어진 것이다. 곧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동물 제사를 폐하고 이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 것이다. 


속죄의 율법에서 동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첫 언약이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린 제사를 새 언약이라 한다.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은 상벌의 율법의 첫 언약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히 9:15) 그러니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은 상벌의 율법의 첫 언약의 저주가 있을 때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은 상벌의 율법의 첫 언약의 저주가 있을 때 세워지는 것으로 저주가 있다는 것은 율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곧 열국에 흩어지는 것은 율법의 심판을 받아 저주로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이 주어진 것이다. 


동물 제사도 제물을 드리면 속죄가 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물도 속죄가 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제물이 되신 것으로 이는 민족적인 대 속죄이다. (마 1:21. 사 53:6, 8) 이 제사가 민족적인 대 속죄이니 흩어진 열국에서 민족이 보전되는 것이다. 그러니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유대인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은 상벌의 율법의 첫 언약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것이니 상벌의 율법의 첫 언약의 저주가 있을 때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상벌의 율법의 새 언약과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은 그 세워지는 시기가 다른 것이다. 


이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은 복음과는 다르다. 그러나 다 같이 믿음의 법이다. (롬 3:27) 그러면 속죄의 율법의 새 언약과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언약은 민족적이나 복음은 개인적이다. 언약이 민족적이라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복음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 곧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복음이 개인적인 것이니 유대인에게도 개인적으로 적용된다. 


복음이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것은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무할례가 되어 이방인과 같이 무할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롬 2:25) 그러니 이들에게도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이 복음을 받는 것도 무할례가 할례가 되게 하는 것으로 언약을 다시 얻는 것이다. (히 9:15) 그리고 복음은 이방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엡 3:6) 그러니 이방인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약속 곧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속조의 율법의 새 언약과 복음의 믿음은 약속을 굳게 하는 것이다. (롬 4:16) 이 약속은 곧 열조의 언약이다. 그러니 복음은 열조의 언약을 굳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이 약속을 견고케 하신 것이다. (롬 15:8) 그러니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열조의 언약을 다시 얻는 것이다. (히 9:15) 그러니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열조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열조의 언약을 폐하지 못한다. (갈 3:17) 그러나 로마교의 신학은 복음으로 열조의 언약을 폐하였다. 


그러니 복음으로 열조의 언약을 폐하면 복음이 열조의 언약을 얻는 방편인데 언약을 폐하면 복음을 믿음으로 얻으려 하는 언약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으로 언약을 폐하는 것은 언약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교의 복음은 성경적인 복음이 아니다. 곧 다른 복음이다. 그러니 로마교의 복음은 열조의 언약을 믿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죽였다. 


복음이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갈 3:8)그 복이 곧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 (엡 3:6)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다. (갈 3:9)


그러니 복음이란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인하여 모든 족속 곧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창 12:3. 18:18. 22:18) 그의 씨 곧 그의 자손은 약속의 자손으로 그리스도이다. (갈 3:16) 그러니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약속대로 유업을 잇는 것이다. (갈 3:29)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복음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곧 범죄가 율법을 범함 것이니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곧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는 열조의 언약에 거하는 것이니 율법을 범에 무할례가 되었다가 다시 할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이란 열조의 언약을 다시 얻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도 믿음으로 구원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언약을 받았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이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로 유대교와 같이 언약의 종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복음은 언약을 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의 대체 신학은 복음으로 언약을 폐하였다. 곧 열조의 언약 뿐 아니라 율법의 언약까지 폐한 것이다.


그러면 구원이 열조의 언약을 얻는 것이요 참여하는 것이니 무할례자가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례를 받았던 무할례자는 다시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침례를 받는 것으로 다시 할례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곧 구원은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니 할례자가 율법을 범해 무할례자가 되어 다시 율법을 지키면 그 무할례자는 할례자로 여기게 된다. (롬 2:26) 그러니 다시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표로 침례를 주시는 것이다. 이 침례의 법을 유대인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이방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곧 침례를 복음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이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방인도 침례를 받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열조의 언약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언약을 받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믿음에 의하나 언약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침례는 의롭다함을 표징 하는 것이나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다. 


그러니 복음을 믿으라 하는 것은 언약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곧 구원이다. 이 구원은 언약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약속이나 언약이 이루어질 때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언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약속을 받고 죽었다가 이 언약이 이루어질 때 부활하게 된다. 


이 할례는 두 종류가 있다. 곧 육신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이다. 이방인은 육신의 할례를 받지 못했다 했고 유대인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육신의 할례를 받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주어졌다. 이 율법의 언약이 상벌의 율법의 첫 언약이다. 이 언약을 범할 때 열국에 흩어지는 저주가 있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는 율법을 범한 유대인이 열국에 흩어졌다가 돌아와서 받게 된다. 유대인이 열국에 흩어졌다가 돌아오면 새 언약을 받게 된다. (렘 31:31) 이 새 언약에서는 새 영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신다. (겔 36:26-27)이는 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렘 31:33) 그러니 새 영을 받고 새 마음을 받는 것이 마음의 할례가 된다. 


그러니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율법이 성문법으로 주어졌으나 마음에 할례를 받을 때는 율법 불문법으로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신의 할례와 마음에 할례가 있듯이 침례도 육신의 침례와 마음의 침례가 있는 것이다. 곧 물 침례와 성령 침례이다. 

물 침례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이요 성령침례는 마음에 법을 기록하는 것으로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방인이 육신에 할례를 받지 못했으나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으로 성령침례가 있는 것이다.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렇게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하는 것은 행하게 하려함이다. 이렇게 행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 곧 성령침례를 받은 자는 행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과 언약은 원수와 사랑처럼 다르다는 것이다. (롬 11:28) 곧 유대인은 복음으로 하면 이방인을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자이나 택함으로는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을 보는 눈은 복음이 아니라 언약 곧 택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반유대주의는 금물이다. 



다윗의 언약 

다윗의 언약에는 다윗과 그의 후손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이다. (시 89:3-4, 27-37) 왕은 정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 왕위는 율법의 언약의 영향을 받게 된다. 곧 율법을 범한 저주로 열국에 흩어질 때 왕은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에 끌려간다.(신 28:36) 그러니 그 나라가 없어지며 보좌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지속되려면 율법의 저주에서의 구원이 필요하다. 이 죄를 담당한 자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인 그리스도이다. 


여기에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 죄를 담당하였다는 것에 주목된다. 이는 그 목적이 죄를 담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과 다윗의 자손에게는 언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열조의 언약과 같이 영원하다고 했다. (삼하 7:13) 그러나 왕이 되려면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나라가 있으려면 백성이 있어야 한다. 백성이 있게 하려면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야 한다. 그러니 이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린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므로 흩어진 열국에서 보전되어(사 49:6) 율법의 저주가 끝날 때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 돌아온 자들이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는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것은 다윗의 나라와 보좌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재림의 그리스도는 왕으로 오신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죄를 담당하러 오신 그리스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다윗의 언약은 열조의 언약과 연관된다. 열조의 언약이나 다윗의 언약이 율법의 언약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가 끝나면 열조의 언약이 회복될 때 다윗의 언약도 회복되는 것이다. 곧 다윗의 언약에 의하여 오시는 메시야가 열조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다. 끝.